[국제칼럼]프랑스의 ‘긍정적 차별’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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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국제칼럼]프랑스의 ‘긍정적 차별’ 정책

by 경향글로벌칼럼 2014. 8. 31.

프랑스의 오랜 공화주의 전통이 21세기 들어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지난달 25일 올랑드 대통령이 발표한 개각을 살펴보면 남성과 여성의 장관 수가 8명으로 정확하게 동등하다. 아무런 법적 의무가 없음에도 실현된 남녀동등정부는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정치적 선택이다. 프랑스 권력 엘리트의 산실이라고 불리는 파리정치대학에서도 지난 10여년간 사회적 약자를 우대하는 긍정적 차별 정책을 실험해 왔다. 원래 프랑스의 정치 전통은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미국에서 1960년대 이후 소수 집단을 위한 긍정적 차별 정책이 확산될 때도 프랑스는 ‘공화주의 평등’을 내세우며 쿼터제에 적대적 반응을 보였다. 아직까지도 프랑스에서는 이민자의 출신 국가나 인종별 통계를 내는 것조차 금지하고 있다.

프랑스 공화주의의 변화는 정치와 엘리트 교육에서 시작되었다. 2000년 ‘정치에서 남녀동등에 관한 법’은 여성을 다수 공천하는 선도적인 정치세력에 재정적 지원을 늘리는 인센티브를 제안했다. 덕분에 여성 정치인의 수는 증가했지만 국회에서의 비중은 여전히 4분의 1 수준이다. 진보적 사회당 정부가 남녀동등정부를 앞세워 정치 변화를 주도해 나가는 이유다.

정치 엘리트의 산실 파리정치대 역시 긍정적 차별 정책을 2001년부터 입시에 도입했다. 프랑스는 서민이나 이민자들이 집거하는 열악한 환경의 지역을 ‘교육우선지역’으로 지정하는데, 파리정치대는 이 지역 출신 학생들을 특별 선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범적으로 17명에서 시작하여 2013년에는 150여명으로 늘어났다. 선발 학생의 4분의 3은 장학금을 받으며, 3분의 2는 부모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이 이민자다.

사르코지 프랑스 전 대통령(왼쪽)과 故 리샤르 데쿠앵 파리정치대학 전 총장(오른쪽) (출처 : 경향DB)


고작 한 대학의 변화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프랑스에서 파리정치대는 독보적인 존재다. 미테랑, 시라크, 올랑드 등 1980년대 이후 모든 대통령이 이 대학 출신이고, 심지어 사르코지는 수학했지만 성적 미달로 졸업하지 못한 경우다. 1958년 이후 제5공화국에서 12명의 총리와 대다수의 장관을 배출하기도 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국가귀족>이라는 저서를 통해 권력 엘리트의 사회적 재생산과 그 비민주성을 비판한 바 있다.

이 대학의 기회균등 정책은 사회적 비판에 대한 반성이었지만, 곧바로 보수 세력의 반발에 부딪혔다. 우파 학생조직이 입시에서 일부를 특별한 방식으로 선발하는 것은 공화주의 평등의 원칙에 벗어난다고 헌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헌재는 정책의 공익적 성격을 인정하여 합헌 판결했고, 덕분에 정책은 유지 및 확대 시행될 수 있었다.

좌·우파 양측의 비판 속에서 다듬어진 이 대학의 긍정적 차별 제도는 여러모로 획기적이다. 우선 선발과정이 치밀하다. 소속 고등학교에서 1차 선정된 학생은 3인의 선발위원회에서 30분 이상의 심층 면담을 거쳐야 한다. 서류나 형식적 만남보다는 학생과의 장시간 대화를 통해 동기와 의지, 잠재력을 판단하겠다는 의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선발된 학생들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다. 가정환경이 어려운 학생들이 석사과정까지 마치는 5년 동안 학비가 면제되는 것은 물론 대학 기숙사의 방이 무상으로 주어지고, ‘알바’에서 해방되어 학업에 전념토록 매년 6200유로(800만원 정도)의 장학금이 주어진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도록 엄격한 선발과 확실한 지원으로 사회 혁신의 실험을 추진하는 셈이다. 한국에서도 지난 10여년간 대입에서 다양한 선발방식이 도입되었다. 불행히도 선발과정은 형식적이고, 학교 생활에 대한 지속적 지원으로 연결되지 못한 듯하다. 사회적 다양성을 위해 국가의 전통을 바꾸면서까지 새 정책을 시행한 프랑스의 확고한 의지와 실천을 곱씹어볼 일이다.


조홍식 | 숭실대 교수·사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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