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의 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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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의 비용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1. 23.

정치 신인이라던 대통령은 알고 보니 외교의 달인이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세련된 외교 매너로 서구 언론의 혼을 쏙 빼놓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마크롱이 국제사회의 새로운 리더로 부상하고 있다고 썼고, 영국 가디언은 마크롱에게 ‘외교적 제스처의 장인(master)’이라는 수식어를 선사했다. 최근 마크롱은 독일·영국 등 다른 유럽 주요국 정상들보다 더 빈번히 뉴스 머리기사를 장식하고 있다.

 

마크롱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가 상징을 적절히 활용해 정치와 외교에 서사를 불어넣기 때문이다. 상징 활용은 정상 외교의 각종 이벤트에서 두드러진다. 마크롱은 지난해 9월 그리스 아테네를 방문해 유럽통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유럽연합(EU)의 미래상을 제시할 곳으로 민주주의가 태동한 아테네보다 더 적합한 장소가 어디 있었을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프랑스 혁명기념일인 바스티유 데이(7월14일) 행사에 초청한 것도 세심하게 기획된 작품이다. 이날 마크롱은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트럼프에게 보여줌으로써 프랑스군의 위용을 과시했다. 이달 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말(馬)을 선물한 것이나 영국에 11세기 자수작품 ‘바이외 태피스트리’를 대여하기로 한 결정도 마크롱이 상징 외교에 들이는 정성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사례들이다.

 

의미 있는 선물과 이벤트로 감동을 안기다가도 분쟁과 갈등에 예각을 세우고 직설을 아끼지 않는 것 역시 마크롱 외교의 특징이다. 특히 공동 기자회견에서 상대국 정상 면전에 ‘돌직구’를 던지는 방식을 즐겨 사용한다. 지난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는 자신에 대한 허위 기사를 유포한 러시아 매체를 비난했고, 지난달 초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의 공동 기자회견에선 미국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선언한 것을 비판했다. 이런 외교술 덕분에 프랑스는 할 말은 하는, 갈등의 중재자이자 해결사라는 평판을 쌓아가고 있다.

 

프랑스의 위상이 올라가는 사이, 거의 모든 국제문제의 해결사를 자임했던 미국의 신뢰도는 이울고 있다. 마크롱이 상징과 직설 사이에서 솜씨 좋게 줄타기한다면 트럼프는 막말의 ‘외길 인생’을 걸어가고 있는데, 막말도 대륙 하나를 들었다 놓을 정도의 폭탄 발언만 골라서 하고 있다.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 입과 트위터로 쏟아내는 무신경하고 부주의한 발언은 전 세계에 혼란과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 아이티와 아프리카 국가를 ‘거지소굴(shithole)’이라 부른 것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정부 관계자와 시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내 핵단추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것보다 크다”는 말은 트럼프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논란과 실제 건강검진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북한은 화염과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며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켰던 것도 트럼프의 거친 발언이 초래한 비용이다. 백악관에서 막말이 나올 때마다 골치를 앓았을 미국 언론은 트럼프의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며 “거의 매주 드라마를 찍었다”고 평가했다. 미국 시민들이 트럼프에게 느끼는 피로감은 수치로 구체화되고 있다. 취임 1주년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국정수행 지지도는 40%에 그쳤다. 외교 업무 수행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답변은 56%, 다른 나라 정상들이 트럼프를 존경하지 않을 것이라는 답변도 65%에 이르렀다.

 

마크롱은 최근 어느 인터뷰에서 트럼프의 거지소굴 발언을 비판하며 “그는 고전적(classical) 정치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고전적인 정치 문법을 모르는 트럼프에게 마크롱 수준의 외교 수완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트럼프의 임기는 3년 더 남았다. 그가 무분별한 발언으로 평지풍파 일으키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설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국제부 | 최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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