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아직 먼 내부 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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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손제민의 특파원 칼럼

미국, 아직 먼 내부 단결

by 경향글로벌칼럼 2014. 8. 27.

미국 미주리주 퍼거슨시의 흑인 시위 취재를 마치고 워싱턴에 돌아온 지 이틀 뒤 전화가 걸려왔다. ‘미주리주 커크우드’라고 표시된 모르는 번호였다. 경찰 총에 맞아 숨진 마이클 브라운의 사망 현장에서 만났던 사람이었다. 1960년대 흑인운동가 ‘말콤X’를 연상케 하는 외모에 “우리 흑인들 중 이 땅에 자발적으로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들 노예로 끌려왔을 뿐”이라고 결연하게 얘기를 시작했던 스물한살 청년이다. “기자들이 떠나고 나니 경찰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평화적인 시위대를 넘어뜨리고 잡아들이고 있다.” 주방위군 배치와 함께 퍼거슨에 밀물처럼 나타났다가 주방위군 철수와 함께 1주일 만에 썰물처럼 빠져나간 기자들에게 못내 서운한 듯했다.

퍼거슨에서 만난 흑인들은 멀리서 외국 언론이 자신들의 얘기를 들으러 와준 것에 고마워했다. 가능하면 오래 머무르면서 ‘이 말도 안되는 현실’을 바깥세상에 알려주기를 원했다. 평소 백인 경찰의 위압에 눌려 찍소리도 못하던 흑인들은 수첩과 펜을 든 동양인 기자와 얘기하는 동안 옆에서 감시하는 경찰들을 흘끔흘끔 보면서도 경찰이 들으라는 듯 필요 이상으로 큰 목소리를 냈다.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이 외신기자를 봤을 때 느낌이 그랬을까.

18일 밤 늦게 퍼거슨시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최루탄과 화염병이 한바탕 오간 뒤였다. 현장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헬멧을 쓰고 장총을 든 경찰이 눈을 부라리며 막았다. “취재차 온 한국기자다. 오늘부터 야간통금은 해제되지 않았느냐”고 묻자 “잠시도 서지 말고 당장 돌아나가!”라는 고함이 들려왔다. ‘이곳이 바로 전쟁터구나.’ 이날을 기해 야간통금이 해제됐지만 대신 이른바 ‘5초 룰’이란 게 생겨 한 곳에 5초 이상 머무르는 사람은 누구든 경찰에 체포될 수 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시위 첫날부터 현장을 지켜온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미주리 지부의 그랜트 도티 변호사는 경찰의 조치들에는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수정헌법 1조 위반이 수두룩하다며 일일이 소송을 걸겠다고 별렀다.

미국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시위에 참석한 한 남성이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_ AP연합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당선되며 오랜 인종갈등에 이정표가 마련된 것으로 알았던 미국에서 퍼거슨은 어디쯤에선가 시간이 멈춰버린 곳일까. 그렇지 않다. 퍼거슨은 갈수록 불평등해지는 미국 사회의 현주소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인구의 3분의 2가 흑인이지만, 경찰 53명 중 50명이 백인인 곳. 백인 경찰들 대부분이 사는, 도로 하나 건너면 있는 옆 동네에 비해 평균수명이 15년이나 짧은 곳. 도로교통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도 언제든 ‘벌집’을 만들 준비가 돼있는 경찰은 과연 누구를 위해, 무엇을 지키려고 있는가. 그 기막힌 현실 속에서 아무 말 않고 살아온 흑인들이 신기할 정도였다.

가만히 보면 미국 도시들은 대부분 그렇게 흑과 백의 선이 그어져 있다. 1년 전 처음 워싱턴에 왔을 때 흑인들이 사는 워싱턴 동북부 지역을 ‘깜깜한 곳’이라고 부르며 어지간하면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동료들의 얘기를 듣고 나부터도 그 지역을 기피했던 게 사실이다. 인간이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끼리 무리 지어 살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러한 거주의 분리가 자원 배분의 심각한 불평등을 반영하고, 생사의 문제까지 영향을 줄 정도라면 그건 정책적인 교정이 필요한 사안이다. 담장을 더 높이 쌓고 경찰을 더 중무장시켜 내 재산을 보호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얼마나 지속가능할까. 아직 인종과 계급의 문제가 미국만큼 첨예하게 얽히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한국도 예외라 할 수 없다.

워싱턴에 돌아오니 국면은 이미 퍼거슨 사태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과 전면전쟁을 하느냐 마느냐로 옮겨가고 있었다. 미국은 끊임없이 외부의 적에 직면하고 있지만 그것이 미국을 단결시켜주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은 아직 자기 안의 ‘국가건설(nation-building)’조차 되지 않은 나라인데….


손제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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