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자지라의 앞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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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자지라의 앞날

by 경향글로벌칼럼 2017. 6. 8.

1999년 1월27일 저녁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수도 알제 시내가 갑자기 캄캄한 암흑이 됐다. 전기가 나갔다. 전기가 부족해서도, 전력회사의 실수도, 천재지변이 온 것도 아니었다. 정부가 일부러 끊은 것이다. 정부가 수백만명의 불편과 바꾼 것은 알자지라 방송이었다. 이날 알자지라는 알제리 반정부 인사의 토론을 내보낼 예정이었다. 알제리군의 민간인 학살 같은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그해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카타르 도하 알자지라 본사를 방문했다. 무바라크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 모든 소란이 이 작은 성냥갑에서 나온단 말이냐.” 개국한 지 3년밖에 안된 카타르의 방송사는 그렇게 중동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무바라크는 2년 후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의 시민혁명으로 30년 독재를 내려놓고 대통령에서 물러났다.

 

지금 알자지라는 다시 걸프국이 주도한 카타르 ‘왕따’ 사태의 최전선에 섰다. 이웃 나라 쿠웨이트 군주 셰이크 사바가 중재를 자처하며 왕따를 주도한 사우디아라비아로 날아갔지만 갈등은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다. 걸프국들이 원하는 건 뭘까. 걸프 안팎에서는 카타르와 이란의 친밀한 관계, 카타르의 ‘얄미운’ 개혁 등 여러 배경이 복잡하게 얽힌 이번 사태의 희생양으로 알자지라가 거론된다.

 

3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사우디, 바레인,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은 수개월의 외교분쟁 끝에 카타르 주재 자국 대사를 모두 소환했다. 그때도 알자지라가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 팔레스타인 하마스 같은 저항조직의 창구 역할을 하면서 지역 안보를 위태롭게 한다는 게 이유였다. 결국 카타르의 특사가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을 만난 직후 카타르는 알자지라의 이집트 채널을 폐쇄하겠다는 양보안을 내놨다. 단교까지 치달은 상황을 볼 때 카타르는 이번에 더 큰 양보를 해야 할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UAE의 유명 지역 평론가인 술탄 소우드 알카세미는 지난 4일 트위터에 “카타르의 첫 화해 제스처는 알자지라 폐쇄가 될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1996년 4월 영국 BBC방송이 사우디 정부와 공동 소유하고 있던 ‘BBC아랍’이 사우디의 검열을 둘러싼 갈등 끝에 문을 닫았다. 이곳에서 일하던 인력과 카타르의 셰이크 하마드 전 국왕이 ‘빌려준’ 5억 카타르 리얄(약 1500억원)이 합쳐져 그해 11월 알자지라가 탄생했다. 알자지라는 철저한 정부의 보도 통제에 익숙하던 중동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 버렸다. ‘물주’인 카타르 왕실과 정부를 빼면 알자지라의 보도 대상이 아닌 게 없었다. 알자지라는 아랍권 TV로는 처음으로 히브리어를 하는 이스라엘인을 방송에 내보낸 언론이었다. 알자지라가 선보인 라이브 토크쇼 <반대방향(The Opposite Direction)>은 늘 논쟁거리였다. 알자지라의 모토는 ‘의견 그리고 또 다른 의견’이다. 종래 언론에서 볼 수 없던 다른 목소리와 금기들이 전파를 탔다. 그들은 서방 언론과도 달랐다. 알자지라만 내보낼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BBC, CNN 등에서 재방송됐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개국 후 첫 10년 동안 카타르 정부에 450건이 넘는 외교적 항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지난해 개국 20년을 맞은 알자지라는 400만명이 넘는 시청자를 확보한 중동의 1위 방송사가 됐다.

 

2010~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중동의 ‘알자지라 울렁증’은 더 극심해졌다. 당시 알자지라는 소셜미디어와 함께 ‘아랍의 봄’의 일등 공신으로 거론되며 ‘알자지라 효과’라는 말을 낳았다. 이집트 사상 최초 민선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를 축출하고 들어선 엘시시 정권은 2014년 “무슬림형제단을 지지하는 보도로 테러를 도왔다”며 알자지라 기자들을 가두고 추방했다. 사우디도 단교하자마자 알자지라의 리야드 사무소를 폐쇄해버렸다.

 

걸프국들과 카타르가 어떤 타협을 볼지 아직은 알기 어렵다. 만약 타협안에 휘말려 ‘다른 목소리’가 사라지게 된다면 불행한 일이다. 다른 건 원래 불편한 법이다.

 

국제부 이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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