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모의 외교포커스]핵주권과 비확산체제의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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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유신모의 외교포커스]핵주권과 비확산체제의 공존

by 경향글로벌칼럼 2014. 8. 25.

4년간 이어져온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이 막바지 단계에 진입했다. 한·미는 올해 안에 협정문에 가서명을 하고 내년 상반기 안에 의회 비준 등 발효를 위한 국내 절차를 시작할 예정이다. 협상이 아직 종료된 것은 아니지만, 한국은 이변이 없는 한 개정된 협정하에서도 당장 핵연료 제조를 위한 우라늄농축과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를 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경제적·정치적 여건이 바뀔 경우 농축·재처리를 다시 논의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은 농축·재처리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낡은 협정을 개정해 미국과의 원자력 기술교류, 장비 및 부품의 이전과 수출 등을 간편하게 하고 연구활동의 제약을 완화해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정부가 제시한 원자력협정 개정의 3대 목표도 농축·재처리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 하지만 지난해 이 문제로 국내에서 ‘핵주권 확보’의 광풍이 불어닥쳤던 일을 떠올려보면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한·미 원자력협정의 농축·재처리 조항은 ‘핵주권’과 ‘국제 비확산체제 유지’가 충돌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말하는 핵주권이란,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농축·재처리 공정을 포함한 핵연료주기 완성 즉, 평화적 핵이용 권리를 말한다. 하지만 미국은 핵무기 확산을 막기 위해 외국과의 원자력협정에서 농축·재처리를 배제할 것을 원한다. 이 기술이 평화적 핵이용과 핵무기 제조에 모두 사용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일부 강경 비확산주의자들은 이를 ‘골드 스탠더드(황금기준)’라고 표현하면서 모든 나라에 이를 적용할 것을 주장한다.

만약 한국이 농축·재처리가 즉각 허용되지 않는 협정 개정에 합의한다면 이는 외교적 실패를 의미하는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핵주권을 제약받게 됨을 의미하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핵주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행사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국은 이미 국제법적으로 모든 나라에 보장된 핵주권을 갖고 있다. 다만, 국익 차원에서 이를 행사하는 것을 유보할 뿐이다.

한국은 그동안 한·미 원자력협정 때문에 농축·재처리를 못한 것이 아니다. 실익이 없어 하지 않은 것이다. 현행 협정으로도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농축·재처리를 할 수 있다. 현행 협정에는 농축에 대한 규정 자체가 없고,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장비·기술에서 비롯된 핵연료는 재처리해도 한·미 원자력협정 위반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이 농축·재처리를 안 하고 있는 것은 국제 비확산체제를 준수하고 한·미 관계를 존중하기 때문이며 농축·재처리가 경제적·정치적으로 전혀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많은 나라들이 농축·재처리 기술을 갖고 있고 제약도 없지만 하지 않고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 아일랜드 원자력발전소의 1호기(왼쪽 굴뚝 2개)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지만, 1979년 사고 난 2호기는 여전히 가동되지 않고 있다. (출처 : 경향DB)


소수의 몇 개 나라가 핵기술을 독점하던 시대는 지났다. 지금 마음만 먹으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가 수십개국에 이르고 핵무기 제조 기술도 더 이상 어려운 것이 아니다. 현재의 국제 비확산체제는 핵기술 확산을 막기 위한 통제와 압박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핵주권 행사를 스스로 자제하는 각국의 자발적 선택으로 유지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비확산체제가 유지되려면 비보유국의 핵주권 행사 자제도 필요하지만, 핵보유국과 핵연료 공급국의 의무도 보태져야 한다. 이들에게는 각국이 직접 농축·재처리의 유혹을 느끼지 않도록 농축우라늄 가격 구조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킬 의무가 있다. 또 비보유국이 핵무기를 가져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도록 평화적인 국제 안보질서를 유지하는 것도 이들의 의무다.

지금 비확산체제를 흔드는 주범은 비보유국의 핵야망이 아니다. 핵 협정의 예외를 원칙 없이 남발하면서 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을 거부하고 중동·우크라이나·아시아에서 힘의 충돌을 야기해 주변국들의 안보 불안을 조장하는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행태가 비확산체제를 위태롭게 만든다. 실효성도 정당성도 없는 ‘골드 스탠더드’로는 미국이 원하는 비확산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 핵보유국과 비보유국 모두 자신들에게 맡겨진 군축·비확산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핵무기 없는 세상을 지향하는 ‘플래티넘 스탠더드’가 필요하다.


유신모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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