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10일 과테말라 대법원은 전 군부독재자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장군이 1980년대 초 원주민 1771명을 학살한 혐의를 인정해 집단학살 50년형, 반인륜범죄 30년형 등 징역 80년형을 선고했다. 국제사면위원회에 따르면, 이는 라틴아메리카 집권세력의 집단학살 혐의를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었다. 1980년대 초 과테말라 내전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자행된 원주민 집단학살은 아르헨티나 군부의 ‘추악한 전쟁’(1976~1983)과 더불어 라틴아메리카 최악의 국가폭력으로 손꼽힌다. 각국의 집권 군부는 이른바 ‘국가 전복세력’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자국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리오스 몬트의 대량학살 혐의는 1983년 원주민 여성 리고베르타 멘추의 생생한 구술 증언 덕분에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사건 발생 30년이 지난 뒤 사법적 판결이 내려졌다는 사실은 과거사 정리의 어려움을 분명하게 실증한다. 20세기 후반 이래 세계 각지에서 반인륜적 폭력행위에 대한 진상조사와 배·보상이 활발해졌지만, 미결 과제가 적지 않다. 가해자들이 막강한 권력을 유지하면서 집단면책을 받은 경우가 있고, 가해자들의 반발뿐 아니라 진실규명과 정의실현이라는 가치와 갈등의 최소화나 화해의 필요성이라는 현실론 간의 충돌, 신속한 청산 주장과 신중하고 절차에 맞는 법 집행 요구 간의 충돌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곳에서든 정치역학에 따라 과거사 정리의 수위와 속도가 달라질 수 있고 철저한 진상과 책임의 규명보다는 가해자들과의 정치적 타협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법치는 흔들리고 가해자와 피해자 어느 쪽도 만족하지 못한 채 사회적 갈등이 지속되며 시간이 흐를수록 대중의 관심은 줄어든다. 과거사 정리 작업은 정치적 진공이 아니라 정치적 대립의 현실 속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진상규명의 때늦은 추진이나 과거사 정리의 후속조치가 정치적 공세라면, 그것을 회피하거나 가해자의 범위, 책임과 처벌의 수위를 조절하려는 시도 역시 정치적 행보이다. 그러므로 과거사 정리는 역사가들에게 맡겨둘 작업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정치적 결단에 의해 시작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관건은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나 기억의 의무를 강조하는 차원을 넘어 얼마나 설득력 있는 정치적 행위로 귀결되느냐일 것이다.
또한 일방적 기억의 강제와 역사화는 후속 세대가 부담스러운 과거사와의 대면을 통해 비판적 성찰 능력을 키우고 상흔을 치유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고 바람직한 역사 인식에 해악을 끼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최근 논란을 일으킨 종편방송의 5·18 민주화운동 왜곡 시도는 역사적 진실과 진지하게 대면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비극을 집약해 보여준다. 일본의 폭압적인 식민지배에 분노하고 일본 극우 정치인들의 망언과 궤변을 규탄하는 한국 사회의 과거사 인식은 이중적이거나 부분적이다. 이를테면 독립문 근처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역사적 사실의 의도적 누락과 일방적 기억의 강제를 예증하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 통치의 만행을 고발하는 이곳의 시간은 1945년에 멈춰져 있다. 이곳은 1975년 4월9일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의 주모자로 몰린 30~40대 청장년 8명이 군사법원의 확정판결 후 20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법살인’의 현장이지만, 군부독재의 어두운 그림자를 감춘 채 ‘항일 투쟁 유적지’라는 절반의 기억만을 드러내고 있다.
5·18 전야제 모인 사람들 (경향DB)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다중의 청산 과제를 지녔기 때문에 ‘과거사 정리의 백화점’으로 알려져 있는 한국의 5월은 이제 민간인 학살사건이 발생한 지 ‘26년’을 넘어 33년을 흘려보냈다. 그럼에도 책임의 규명과 사법적 판결이 난망한 현실은 한국의 ‘국격’을 웅변하는 것이리라. 야당 후보를 지지하는 수많은 국민들을 ‘국가전복세력’으로 치부했다는 어느 극우 논객의 최근 꼴사나운 추태를 지켜보아야 하는 수치와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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