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해지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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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해지지 말라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11. 6.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구글을 방문한 적이 있다. 여러 동의 건물이 들어선 드넓은 단지에선 대학 캠퍼스와 비슷한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직원들은 구글 로고처럼 파란색과 노란색, 빨간색, 초록색이 칠해진 자전거를 타고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이동했다. 햇볕이 좋은 곳엔 파라솔 꽂힌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사무실이 답답한 직원은 야외에서 일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방문객을 안내하던 구글 직원은 이 같은 구글 특유의 환경과 구내식당에서 공짜 점심이 제공된다는 사실을 힘주어 자랑했다.

 

구글의 업무 단지는 이방인의 부러움을 사고도 남을 만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선 이게 과연 좋기만 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직원들이 건물 사이를 오갈 때 타던 자전거는 탐날 정도로 예뻤지만 ‘걸어 다닐 시간을 아껴서 일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구내식당의 점심도 마찬가지였다. 점심을 위해 외출하는 시간을 단축하겠다는 심산으로 공짜 점심을 주는 것은 아닐까. 야외 테이블도 직원들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구글 로고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매출을 늘려서 이룩한 부로 구글은 무엇을 했나. 지난달 25일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구글은 성추행 혐의가 제기돼 회사를 떠난 안드로이드 개발자 앤디 루빈에게 9000만달러(약 1011억원)의 퇴직금을 지급했다. 사측은 피해자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루빈에게 거액을 쥐여준 것으로 확인됐다. 성폭력 고발 운동 ‘미투’가 미국 사회를 휩쓴 것을 지켜보고도 구글은 좋게 말하자면 성추행 가해자를 안이하게 처리했고,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아직 정신 못 차렸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증했다.

 

뉴욕타임스 보도는 구글 직원들의 분노에 불을 붙이고 기름을 부었다. 직원들은 이번 사태를 구글의 성별 임금 격차와 엮어 경영진의 성평등 의식 수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구글은 동일 노동을 한 여성 직원들에게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지급했다는 혐의로 노동부 조사를 받고 있다. 어느 직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구글은 특유의 직장 문화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존중과 정의, 공정함의 기본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방문객들에게 자랑하던 아름다운 근무 환경은 직원들 입장에선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구글 직원들은 사측의 성추행 대처에 항의하기 위해 지난 1일 오전 11시 파업을 벌였다. 일본 도쿄부터 시작해 지구를 한 바퀴 돌며 싱가포르, 인도, 독일, 스위스, 영국, 미국 직원들이 차례로 손팻말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이들은 사측에 사내 성폭력 보고서를 작성해 공개할 것과, 직원들이 익명으로 안전하게 사내 성폭력을 신고할 수 있는 창구를 개설하라고 요구했다. 성폭력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보호해달라는 주문도 있다. 구글의 사업 신조인 ‘사악해지지 말라’를 경영진부터 준수해달라는 요청이다.

 

그러나 한국 기업의 ‘갑질’ 문화에 비하면 구글은 사악함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수 있다. 땅콩 서비스에 불만을 품고 비행기를 돌린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갑질은 외신에 보도될 정도로 화제였다. 최근에는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이 전·현직 직원 등을 상대로 한 폭행과 엽기적 행각으로 갑질의 새로운 대명사로 떠올랐다. 언론을 통해 알려지지 않았을 뿐 상사의 폭언과 괴롭힘에 시달리는 이들은 수두룩할 것이다.

 

구글 경영진은 미투 운동이 자사 직원을 비롯한 미국인들의 성평등 의식에 경종을 울렸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고, 성추행 가해자에게 거액의 퇴직금을 줬다. 한국의 기업 대표는 직장 갑질로 명예가 실추된 대기업 오너를 보고도 자사 직원에게는 닭을 죽이라고 시켰다. 갑들이 반면교사를 모르고 우를 범하는 사이, 손팻말을 들고 거리로 나설 힘도 없는 을들은 숨죽여 울고 있다. 이방인이 부러워할 직장은 못돼도, 사악해지지는 말아야 한다.

 

<최희진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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