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미국 대선 직후에 에드거 웰츠는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수도 워싱턴까지 약 580㎞ 거리를 운전했습니다. 도착한 곳은 동네 피자가게. 자동소총을 들고 가게로 들어간 그는 지하실을 찾으며 총을 발사했습니다. 갇혀 있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죠. 좌파 지도자들이 유아 성학대를 일삼고 그 가게 지하에서 아이들을 거래한다는 글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가게에 아이들은커녕 지하실도 없었죠.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끝났습니다. 이후 웰츠는 잘못을 시인하고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음모론은 사라지지 않았죠.
사라지기는커녕 이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음모론을 추종하는 이들은 ‘큐어넌(QAnon)’으로 불립니다. 정부 최고 기밀 취급 등급(Q)에서 착안한 이름을 쓰는 ‘큐’가 이들의 지도자입니다. 정부 내부자로 자칭하죠. 이 때문에 그가 ‘밝히는’ 비밀과 주장은 추종자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신임을 얻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세계관이죠. 좌파, 정·재계 엘리트들이 아동 성학대를 일삼는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정말 황당한 음모론들을 따릅니다. 이런 혼란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트럼프가 왔고, 트럼프는 정부 관료, 엘리트들을 상대로 성전을 벌이고 있다고 믿기도 하죠. 요즘 트럼프의 대선 유세장에 가면 큐 사인을 들고 있는 큐어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충성을 무엇보다 아끼는 트럼프로서도 큐어넌은 밉지 않습니다. 큐어넌에 대한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어린이를 보호하려는 사람들”이라며 감쌌습니다. 극소수의 음모론자들을 경계해야 할 대통령이 이들을 정치판 한가운데 올려놓은 셈이죠. 큐어넌 신봉자들이 11월 선거에서 연방의회에 진출하리라는 걱정스러운 전망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각종 테러도 감행해 미 연방수사국 내부 문건에서 테러조직으로 거명됐습니다. 음모론으로 시작했지만 온라인,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폭력까지 행사하는 정치세력이 된 것입니다.
이들의 성장 배경에 대통령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공화당 주류의 책임도 큽니다. 이들은 정치적 승리를 위해서라면 근거 없는 소문, 극단적 정치세력, 인종혐오 등을 가리지 않고 이용했습니다. 그 덕분에 선거에서 승리를 이어갔지만, 공화당의 전통적 가치와 이를 지키는 의원들의 설 자리는 좁아져 갔죠. 악마에게 영혼을 판 듯 공화당은 점점 변했습니다. 2016년 공화당 대선이 그 정점이었을 겁니다. 트럼프라는 인물을 막는 대신 대선 후보로 지명하면서 공화당은 공화당이기를 포기했죠. 이 때문에 미국 정부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음모다’ ‘곧 사라질 것이다’와 같은 황당한 주장에 동조를 하며 사실상 손을 놓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코로나19로 죽어가지만 큐어넌의 환호는 그칠 줄 모르죠.
음모론은 근거가 없기에 증명하기도, 부정하기도 힘듭니다. 그러니 지지자들을 모으고 단결시키기에 안성맞춤이죠. 거짓과 선동, 음모론으로 성장한 정치세력은 거짓을 계속 외칠 수밖에 없고 심지어 거짓과 현실을 뒤바꾸려 합니다. 코로나19의 3차 유행이 시작하는 지금,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된다는 트럼프의 발언이 한 예입니다.
다음주면 미국 대선입니다. 누가 이기건 이들과 이들을 이용하는 정치세력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미국만의 일도 아닙니다. 사탄적 공산화 음모를 규탄하는 사람들, 일본 앞잡이를 찾자는 사람들, 이들을 이용하는 정치인들 모두 사회 전체를 어두운 동굴로 떠미는 것입니다. 스스로 나의 신념에 근거가 있는지, 누군가의 음모론에 동조하고 있는지 점검이 필요합니다. 음모론으로 병든 사회는 시급한 현안을 돌이켜 볼 힘마저 잃으니까요. 오늘도 누군가는 배달에 쓰러지고 학대에 숨죽이고 있습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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