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창]‘IS 정당’ 결코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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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시대의 창]‘IS 정당’ 결코 멀리 있지 않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2. 26.

글쎄, 중동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그게 가능할까? 어느 ‘고딩’의 일탈 사건을 정치세력화의 가능성으로 연결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하기 전에 당신이 이 정당에 당원으로 가입할 가능성이 몇 %인지 먼저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 징후는 3단계를 거친다. 힐링 신드롬, 홈쇼핑, UFC.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에 심하게 중독된 적이 있다면 당신은 그 다음 단계로 IS 정당원 모집 사이트를 클릭할 가능성이 높다.


국가정보원이 IS현상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1999년 출시된 영화 <파이트 클럽>을 ‘강추’한다. 나는 오늘날 시대의 정신을 들여다보는 창문으로 이 걸작을 꼽고 싶다. 영화는 IS 가입 전 1단계 징후로 힐링 열풍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은 사무실의 1회용 테이크 아웃 커피 컵과 복사기에 불과한 자기 존재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저 하루하루 버티는 미생에 불과한 나를 완전하게 채워주는 충만감은 어디서 가능한 걸까? 결국 주인공은 전립선암에 걸린 적도 없으면서 암 환자들의 위로 클럽 쇼핑에 위장 출입한다. 한국에도 한때 유행했던 그 힐링 열풍 말이다. ‘나는 위로받는다, 고로 존재한다.’

힐링 시도에 이은 영화에서의 2단계 징후는 이케아 쇼핑이다. 얼마 전 한국에 매장이 설치된 후 주변 도로를 마비시키는 그 경이로운 가구 브랜드 말이다. 주인공은 수많은 가구 카탈로그의 리스트를 뒤적거리며 신상 주문에 열을 올린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쇼핑도 돈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 징후는 UFC와 같은 파이트 클럽을 동네에 조직하는 것이다. 얼마 전 한국에는 과거 학교 ‘짱’들이 다시 나와 승부를 겨루는 희한한 복고 게임도 등장한 바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놀랍게도 얻어맞아 피를 흘리면서 비로소 힐링이나 홈쇼핑에서도 채워지지 못한 존재의 짜릿함을 맛본다. 사실 자해를 하기 위해 손목을 긋는 이들은 역설적이게도 그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면서 살아있는 존재감을 느낀다고들 한다. 그건 아무리 인공적인 디지털이 발전해도 복제하기 어려운 느낌이다. 누구도 캐리비안 베이 인공 파도 풀에서 익사할 가능성이 적음을 잘 안다. 안전과 짜릿함은 반비례한다. 이 파이트 클럽은 IS가 얼마 전 쇼핑몰 폭파를 선언했듯이 자본주의의 상징인 신용카드 회사에 테러를 감행한다. ‘나는 투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영화의 뛰어난 통찰은 과거 건달 패싸움을 연상시키는 이 소동이 결코 시대착오적 복고가 아니라 현대성에 대한 가장 포스트 모던한 반응이라는 점에 있다. 살아있는 존재의 의미가 점차 공허해지는 미생의 시대에 대한 탈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IS 그룹을 그저 전근대적 이슬람 근본주의 종교 현상으로만 이해하는 이들은 앞으로도 그들의 행보를 예측하기 힘들 것이다.

 

영화 '파이트 클럽' (출처 : 경향DB)

흔히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 IS현상을 그저 이슬람 근본주의 집단의 영향력이 한국에도 생길 수 있는 가능성 정도로 이해하곤 한다. 정부는 처벌의 법리적 근거 마련과 테러 방지 법안 정비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물론 필요한 고민이다.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 IS현상은 현재 지구적으로나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공허함과 희망의 결핍을 어떻게 극복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 지긋지긋한 미로 같은 글로벌 저성장 시대와 기존 문명 패러다임의 대붕괴 앞에서 극단적 정치세력은 필연적으로 등장한다. 이미 미국의 티 파티 운동과 한국의 일베 현상은 그 전조를 보여준 바 있다. 지난 대선에서 허경영신드롬은 희극으로 끝났지만 이후 언젠가 대선에서 변종 IS 대선 후보의 등장 가능성은 희망이 없는 우리 시대의 비극적 증언이 될 것이다.

 

작년에 박노해 문명 사진전의 열풍, 세월호 비극과 교황 방문 사건에서 우리는 누구이며 도대체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것인가를 시민 공동체는 간절하게 물은 바 있다. 올해 초까지 이어진 <인터스텔라> 영화 현상도 본질적으로 같은 시대적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이 물음에 대해 제도권·정치권은 부실한 답안을 제출했다. 혹은 대안적 세력을 자처하는 이들은 1970년대 흑백 텔레비전을 다시 보는 느낌이다. 10년째 한국의 정치세력들에 진정한 도전자 브랜드가 될 것을 주문해온 나는 그들 대신에 IS가 쿨한 이미지로 등장하는 현상이 경악스럽기만 하다. 우리 삶의 의미라는 존재의 간절한 물음에 대해 최소한 그들은 혐오스럽고 병리적 형태로라도 치열하고 매혹적인 답안을 제시하고 있다.

모든 정치세력은 답해야 한다. 과연 자신들은 삶의 진정한 충만함과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주는 출구가 될 수 있는가? IS 정당이 조금씩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다.

안병진 |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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