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리포트] ‘한·미 소통’ 필요한 대북 식량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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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워싱턴리포트] ‘한·미 소통’ 필요한 대북 식량지원

by 경향글로벌칼럼 2011. 4. 4.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은 ‘인도주의적 차원’이라는 전제를 달고 있지만 실상은 정치적 차원의 결단이다. 인도주의는 명분이고 실제 식량지원 여부는 정치적 영역에서 결정된다.

지금 한국과 미국은 세계식량계획(WFP)의 ‘북한 식량사정 보고서’를 놓고 머리를 싸매고 있다. 한국은 북한의 식량사정이 예년에 비해 나쁘지 않으며 보고서 내용을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북한 식량사정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은 정부가 더 잘 안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지난 2월 외교부 공관장회의 강연을 통해 “북한 식량이 1년에 100만t씩 부족한 게 3년 됐다”면서 “식량난은 엄청나게 심각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정부가 WFP에 계산 근거를 추궁하며 지원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대북 지원문제가 인도주의와 무관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미국 역시 WFP 보고서에 대한 신뢰성을 내세워 최종 결정을 미루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이유는 신뢰성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정부가 직접 조사한다 해도, 북한이 보여주는 장소와 자료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기다리는 것은 한국과의 조율, 북한의 입장 변화 등 정치적 문제의 해결이다. 만약 북한이 대남 도발 중단을 선언한다거나 비핵화와 관련된 진전된 태도를 보인다면, 또 한국 정부가 미국의 식량지원을 말리지 않는다면 미국은 WFP 보고서의 신뢰성을 더 이상 문제삼지 않고 식량지원에 착수할 것이다. 

문제는 미국이 안 줘도 그만인 식량문제를 왜 고민하느냐다. 미국은 천안함·연평도 사건 이후 한반도에 꽉 찬 긴장의 에너지를 우려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 북한과 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고개를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대화로 북핵 등 한반도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미국 내에 거의 없다. 다만 대화통로를 만들고 이를 통해 긴장의 에너지를 조금씩 분출시킴으로써 폭발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미국은 당초 남북관계 진전이 이뤄지면 자연스럽게 북·미 접촉을 시작해 긴장관리에 나서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미국은 지난 1월 북한으로부터 북·미 고위급 군사회담 제안을 받고 20일 가까이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가 남북 군사실무접촉이 무산된 것을 보고나서야 북한에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남북 군사회담이 제대로 진행된다면 미국도 그 기회를 살려볼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남북대화가 무산된 것에 대해 상당한 실망감을 표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상황이 더 나빠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일 특별기자회견에서 “북한은 저질러 놓은 일에 대해 사과 표시를 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면서 천안함·연평도 문제 사과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한때 정부가 북한과의 대화 통로를 만들기 위해 ‘남북간 비핵화 회담’과 ‘남북 관계 진전을 위한 회담’을 분리시키는 등 천안함 출구 전략을 모색하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다시 강경모드로 돌아간 셈이다.

한국이 지금처럼 남북 긴장관리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미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 지속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조만간 북한이 다시 도발을 일으키거나, 미국이 북한과 비밀접촉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려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지금 먼저 필요한 것은 북한과의 대화보다 한·미 간의 솔직한 의견 교환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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