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근 칼럼]트럼프의 사랑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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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이대근 칼럼]트럼프의 사랑이 부족하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11. 14.

북한은 한국 전쟁 이후 계속된 미국의 제재 속에서 핵무장을 했다. 제재는 핵무장을 막는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아니, 핵개발을 부추기는 나쁜 방법이었다. 미국은 68년에 걸쳐 입증된 이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전히 제재가 비핵화 전환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믿는다. 이런 신념체계를 지닌 세계에서 북핵 문제가 교착 상황에 처할 때 내릴 수 있는 처방은 제재 강화밖에 없다. 제재 시간이 길수록 제재받는 쪽의 고통은 커지고, 그로 인해 굴복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이 논리를 배반하는 실수를 한 적이 있다.

 

북한이 비핵화 의사를 처음 밝혔을 때 6개월~1년의 단기간 핵 폐기를 요구한 것이다. 북한은 당연히 거부했다. 이때 트럼프는 깨달았을 것이다. ‘조급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북한을 강제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2년 내 핵 폐기를 목표로 하자는 김정은의 유혹적인 제안에 “시간게임을 하지 않겠다”고 뿌리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미국 중간 선거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는 “서두르지 않겠다”고 7번이나 반복했다. 주문을 외고, 자기 최면을 거는 것 같았다. 중간 선거 이후 혹시 대북 접근법이 변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을 품지 못하게 일찌감치 싹을 잘라 버리겠다는 발상으로 보인다.

앞으로 미국이 할 일은 북한이 변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 접근법, 어디서 많이 듣던 것이다.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 시간이 갈수록 오바마를 닮아간다는 말을 트럼프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정말 트럼프 편이어서 그의 성공을 보장할까? 북한은 이미 주변국과의 관계를 상당히 개선했다. 미국이 중국, 러시아와 대립하는 사이 북한이 숨 쉴 구멍은 더 커졌다. 시간이 갈수록 북한의 생존 공간은 확장될 것이다. 이 공간을 제재로 다 막을 수는 없다. 게다가 북한은 제재에 내성이 생긴(sanction-proof) 경제 체제로 진화했다. 시간을 견디는 일에 관한 한 누구보다 익숙하다. 그런 북한을 상대로 대통령·부통령·국무장관이 차례로 나서 앵무새처럼 제재 제재 하고 있다.

 

미국 국제전략연구소(CSIS)는 12일 마치 북한이 미사일 기지 13곳을 숨겨놓은 것을 적발한 것처럼 여론을 호도하는 보고서를 냈다. 이렇게 하면 북한이 겁을 먹고 핵 폐기에 나설까? 아니면, 쉽게 핵을 포기해서는 안되겠다고 마음을 굳게 다져먹을까? 제재 우선 정책은 북핵 문제 해결책이라기보다 ‘김정은에 속고 있다’는 미국 내 비판을 의식한 알리바이용이다. 미국에서 북한의 핵 보유는 나쁜 행동이며, 따라서 핵을 가진 북한과 협상하는 것 또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사고가 퍼져 있다. 핵 무장 이전 상태로 돌아간 북한을 정상으로 간주하고, 그런 조건에서만 북한과 실질적인 주고받기 협상을 하는 걸 바람직하게 여긴다. 이 원상회복론은 현실을 거부하는 접근법이자 책임회피의 논리다. 과거 미국의 대북 실패 없이는 북한 핵무장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국제정치의 현실주의적 시각은 힘을 국가 관계를 지배하는 주요 요소로 본다. 불신이 쌓인 북·미관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오랜 대결 역사에서 양측은 힘을 믿었지, 상대의 선의를 믿지 않았다. 그런데 선의를 믿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북한은 비핵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만한 선제적인 조치를 취했다. 미국은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했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사랑한다고 했다. 선의의 교환이 북·미 정상회담, 그리고 비핵화와 관계개선 합의라는 화해 국면을 조성한 것이다. 북·미가 힘에 의존할 때는 북핵 문제를 악화시켰지만, 선의에 약간의 기회를 줬을 때는 그것만으로도 활발한 대화와 비핵화 진전을 가져왔다. 힘이 힘을 부르고, 선의가 선의를 부른 것이다. 제재와 압박은 비핵화의 조연이지 주연이 아니다. 핵 신고, 종전선언을 둘러싼 협상 과정에 불신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대화가 막힌 지금 부족한 것은 제재가 아니라, 전략적 선의다.

 

권정근 북한 외교성 미국연구소장은 “우리가 주동적이고 선의적인 조치로서 미국에 과분할 정도로 줄 것은 다 준” 상황이라고 했다. 북한은 핵·경제의 병진노선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암시를 했다. 선의라는 연료로 달리던 비핵화 열차에 선의가 바닥나고 있다. 북한이 제재 때문에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없다. 북한 의사에 반해 핵 폐기를 강제하겠다면 전쟁밖에 없다. 그러나 전쟁할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핵 폐기의 길로 가도록 유도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핵 폐기를 북한 선의에만 맡길 수는 없지만, 선의 없이는 핵 폐기가 불가능하다. 트럼프는 알아야 한다. 여기까지 온 것은 ‘사랑’ 때문이지 채찍 때문이 아니다.

 

<이대근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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