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열 | 연세대 국제대학원장
미국발 금융위기, 유럽발 재정위기로 세계 경제가 침체 일로인 가운데 서로 힘을 모아도 시원치 않을 동아시아 국가들이 연일 민족주의를 분출하며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있다. 최근 한국의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데 이어 독도 표지석이 설치되었고, 홍콩 출신 중국계 14인이 일본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센카쿠 열도에 상륙한 후 일본 해상보안청에 의해 체포, 강제 추방당했다. 그들이 들고 있던 깃발은 재미있게도 대만의 청천백일기였다.
이에 대항하여 일본 지방의원 등 10명이 정부 허가 없이 센카쿠에 상륙하여 일장기를 거는 사태가 발생했다. 중국 일부 지역에서 일장기가 소각되는 사태로 이어지고, 중국 정부는 시민들의 반일(反日) 감정이 폭주하는 것을 우려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동아시아 공동체란 말을 꺼내기도 민망한 지경이다.
일본 순시선이 중국 시위대를 싣고 센카쿠 열도로 향하는 배를 에워싸고 있다. (경향신문DB)
이 모든 사태는 영토문제를 둘러싼 민족주의적 충돌 때문이다. 그런데 영토국가가 성립된 근대 국가체제하에서 영토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된 적은 거의 없다. 전쟁이 아니면 풀 수 없는 사안을 놓고 전쟁을 원하지 않으면서 민족주의적 열정에 사로잡혀 상대를 비난하며 대결 구도로 가는 것은 비이성적인 행동이고 그 대가는 크다. 당장 격한 공방 속에서 그간 동아시아에서 일종의 국제 규범이었던 정경분리 원칙이 훼손되고 있다. 경제 성장을 국가 목표 최우선으로 삼아온 동아시아 국가들의 활로를 보장해온 규범이다.
2010년 가을 센카쿠에서의 충돌로 중국이 희토류(稀土類)의 일본 수출을 봉쇄하면서 보복한 이래, 이번에는 일본이 한국과의 통화스와프 규모 축소를 고려하고 있고, 한국은 한·일어업협정의 파기와 재협상을 거론하고 있다. 풀리지 않는 영토 문제가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동아시아의 경제적 호혜관계마저 훼손할 상황이다.
보다 중대한 점은 일본과 러시아가 다투고 있는 북방 4개 도서로부터 시작하여 독도와 센카쿠를 거쳐 남중국해에 이르는 영토 문제들이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전략적 단층선(fault line)상에 정확히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별 사안들이 전략적으로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영토 분쟁을 국지적 문제로 생각하여 민족주의적 감성으로 다루다보면 자칫 보다 큰 강대국간 경쟁을 부추기게 되고, 결과적으로 덩치 작은 국가들이 원치 않는 줄세우기 구도로 말려들어갈 수도 있다.
중국은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센카쿠)에서 핵심 이익을 내세우며 주장적 태도를 굽히지 않고 미국은 적극적으로 견제에 나서며 일본편을 들고 있다. 더 큰 싸움으로 번져 간다면 한국은 독도로 미운 일본과 같은 줄을 서도록 강요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21세기 동아시아가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19세기식 권력정치로 회귀한다면, 무력의 열세에 있는 국가는 더욱 고달프다. 물론 19세기 소국 일본이 청국과 러시아를 꺾고 화려하게 열강의 반열에 오른 성공 스토리도 있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이 19세기 일본의 길을 가기에 세상은 너무나 많이 바뀌었다. 하드 파워 못지않게 소프트 파워가 중요해지고, 주어진 자원의 크기만큼이나 네트워크 능력이 국운을 좌우하는 추세이다. 국경을 넘는 통합체가 현실화되며, 공생의 가치가 존중되는, 그래서 무력이 부족한 중견국에도 희망을 주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다.
민족주의적 경향이 짙어지는 동아시아에서 앞서 나가려면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독도는 우리 땅이지만 영토민족주의에 함몰되어서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둡다. 신자유주의와 성장 제일주의를 넘어 공생과 균형, 복지를 지향하는 시대정신과도 부합되지 않는다. 일본의 민족주의적 대응을 우경화라 꾸짖고 중국의 반일 데모를 고소해하며 바라보고 있지만 사실 한국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민족주의 강국이다. 양국을 야단치려면 부국강병의 기준으로는 불가능하다. 민족 우선의 이념을 완화하고 공생과 균형, 복지를 꾀하는 21세기 문명표준을 선도할 때 비로소 한국은 동아시아네트워크의 중심에 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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