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반기업 정서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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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정동칼럼] 반기업 정서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by 경향글로벌칼럼 2012. 4. 5.

손열 | 연세대 교수·국제정치학 yulsohn@yonsei.ac.kr


 

얼마전 답답한 한·일관계를 풀기 위한 국제회의에 참석차 도쿄를 방문했다. 갑갑한 회의장을 잠시 빠져나와 호텔방에서 TV를 켜자 서양 기자가 일본의 중견 전자부품 수출업체 풀하트의 구니히로 요시히코 사장을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왔다. 사상 유례없는 엔고와 전력난 속에서 회사의 해외 이전을 고려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구니히로는 그럴 생각이 없으며 임금 삭감으로 힘겹게 대응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곧이어 왜 근로자를 해고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문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간단하고 소박하였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인터뷰였다. 구니히로가 처한 기업 환경은 상상 이상으로 어렵다. 첫째, 엔고현상은 일본의 수출기업을 옥죄고 있다. 지난 5년간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은 무려 40% 절상되어 그만큼 가격 경쟁력이 약화된 셈이다. 둘째, 주지하다시피 일본의 저출산 고령화 정도는 세계 최고다. 경제활동 인구가 줄어드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에 봉착해 있다. 셋째, 일본 정부는 세계 최대 채무자로서 GDP 대비 재정적자가 200%를 상회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경제 활력이 감퇴하고 디플레이션이 지속되고 있다. 넷째, 최악의 동일본대지진으로 산업시설이 붕괴되고 총 54기의 원전 중 53기가 가동 중단되어 공장은 세계 최고의 전력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다섯째, 기업은 39.54%란 세계 최고 수준의 법인세를 내야 하고(참고로 한국은 22%), 엄격한 노동규제를 받고 있으며, 온실가스 삭감이란 정부정책에 협조해야 하는 상황이다. 여섯째, 일본은 자유무역협정(FTA) 후진국이다. 수출을 도와줄 이렇다할 대형 FTA를 성사시키지 못한 지 오래여서 FTA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한국은 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 끝으로 일본의 정치는 총리가 일년을 못 버티는 취약한 상황이다. 빈번한 리더십 교체 때문에 장기적 안목에서 일관된 정책을 추진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살인적인 기업환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쟁력을 잃지 않고 있는 일본기업의 비밀이 어디에 있는지 새삼 궁금해졌다. 더욱 놀라운 점은 구니히로처럼 기업인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도 여전히 고용안정을 우선시하고, 단기적 이윤추구를 넘어서 이해당사자들과 장기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데 있다.


며칠 전 대기업을 대변하는 게이단렌(經團連)은 사상 최악의 경제환경에 정부의 현명한 대응을 촉구하는 한편, 기업이 혁신 노력을 배가해야 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기업의 워크·라이프 밸런스” 시책이란 흥미로운 시안을 내놓았다. 직장과 가정의 균형잡힌 생활을 위해 직장 수준에서 육아, 개호, 노동시간 적정화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것이다. 일본의 저력은 장기적 거래관행이 가져다주는 경제체제의 안정성, 기업행위에 있어서 사회적 가치의 고려, 그 결과로서 사회적 응집력(social cohesion)이 유지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구니히로의 이야기를 뒤로 하고 귀국한 저녁, 서울의 TV에서 우리의 경제5단체장은 총선을 앞두고 성명서를 통해 “기업에 대한 무분별한 비판이 기업가정신을 위축시켜 투자와 일자리 확대를 저해한다”며 “경제의 근간인 기업이 경영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근거없는 비판을 자제하고 시장경제원칙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니를 뛰어 넘고 도요타를 추격하는 한국의 대기업들은 더 이상 국가대표 기업이 아니다. 이들이 잘되어야 국민경제가 잘된다는 등식은 깨진 지 오래다. 이들이 벌어들인 이윤이 국민경제에 적하효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의 경쟁기업들과 달리 법인세 감면, 원화약세 정책, 수출시장 확대를 위한 FTA 등 온갖 정책적 지원을 업고 뛰는 한국 기업들은 정책을 위임한 국민들에게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진정한 노력을 보여야 한다. 왜 일본에 없는 반기업정서에 시달리는지 곰곰이 따져 보고 상투적인 시장경제논리를 넘는 답안을 국민에게 제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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