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의동|도쿄특파원 phil21@kyunghyang.com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가 정치생명을 걸고 추진해온 소비세 인상법안이 지난 26일 일본 중의원을 통과하자 한국에서는 노다 총리의 리더십을 칭송하는 평가들이 나오고 있다. 일본이 ‘제자리걸음 정치’에서 탈피해 결정하는 정치를 오랜만에 보여줬다거나, 정권 유지보다 국가의 미래를 더 우선시하는 결단을 내렸다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현지에서 소비세 증세과정을 지켜본 기자로서는 이런 칭찬 일변도의 해석에 동의하기 어렵다. 우선 증세의 방법이 잘못됐다. 노다 정권은 증세로 가장 손쉬운 소비세를 택했다. 소비세란 한국의 부가가치세에 해당한다. 상품에 붙는 세금을 올리는 것인 만큼 조세저항이 적고, 징수도 쉽다.
하지만 소비세는 영세 중소기업과 저소득층이 세금 인상의 직접 피해를 보는 소득역진적 세금이다.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이 증세로 늘어난 비용을 대기업에 전가할 수 있을까. 서민들이 소비를 줄이면 영세상점들은 타격을 입게 된다. 도쿄의 양과자점에서 일하는 한 종업원은 일본의 한 일간지에 “소비세가 오르면 가게 수입은 늘지 않으면서 가격만 올라간다”면서 “손님이 줄어들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 ㅣ 출처:경향DB
반면 ‘부유세’인 상속세나 소득세 인상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일본의 소득세는 연간 과세소득 1800만엔 이상에 대해 40%의 최고세율을 적용한다. 초고소득자에 대해 최고세율을 올리고, 상속세도 공제를 줄이는 한편 금융자산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논의는 내년 이후로 미뤄진 채 소비세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사실 일본은 1990년대 이후 감세정책으로 신자유주의 종주국인 미국보다도 부유층의 부담이 적은 나라가 돼 버렸다. 대장성(현 재무성) 관료 출신인 저널리스트 다케다 도모히로(武田知弘)의 분석에 따르면 연소득 3억4000만엔(2010년 기준)인 도요타 아키오(豊田章男) 도요타자동차 사장의 세부담은 21%인 반면 평균 연소득 430만엔인 사원들의 세부담은 35%에 달한다. 왜 그럴까. 부자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여러 조치들 때문이다. 우선 주식 등의 배당소득에는 소득·주민세를 합해 최대 10%밖에 징수하지 않는다. 세금이나 다름없는 사회보험료도 상한이 설정돼 있어 연소득 1억엔을 넘는 이의 부담률은 평균 소득자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일본 정부는 1990년대 초 거품경제가 무너지자 경기 활성화를 명분으로 부유층 소득세를 대폭 줄였고, 대규모 토목사업에 예산을 마구 투여했다가 재정을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시켰다. 그 뒷감당을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어 충당하겠다는 것이 소비세 인상의 본질이다.
노다 정권은 서민의 부담을 강요하면서도 고통분담의 노력은 보여주지 않았다. 재정지출을 줄이려는 노력은커녕 신칸센 3개 구간, 도쿄 외곽순환도로, 얀바댐 등 불요불급한 대규모 토목사업을 재개했다. 국회의원 정원 삭감 논의는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다. 도쿄시내 금싸라기 같은 땅에 지어진 호화판 기숙사는 시중가보다 몇 배나 싼 임대료를 받고 국회의원들에게 빌려준다.
노다 총리가 부자증세에 정치생명을 걸었다면 몰라도 중소기업과 서민의 팔을 비트는 법안 통과에 성공했다고 ‘뚝심’이라고 칭송할 수 있을까. 야당과 타협하느라 2009년 중의원 선거에서 내걸었던 공약을 깡그리 내던진 것도 결단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재정건전성이 선진국 중 최악의 수준인 일본이 증세로 방향을 튼 것은 일단 바람직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증세는 방법과 수순이 틀렸다. 한국의 증세 논의에서 일본은 ‘모델’이 아니라 ‘반면교사’다.
'경향 국제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고]아시아 속의 수치를 기대한다 (0) | 2012.07.02 |
---|---|
[국제칼럼]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한·미동맹 (0) | 2012.07.01 |
이집트 민주화의 험난한 길 (0) | 2012.06.24 |
[시론]유럽의 위기 ‘패턴’을 읽어라 (0) | 2012.06.24 |
[사설]거꾸로 가는 이집트 민주화 (0) | 2012.06.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