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북·미의 체면 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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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편집국에서]북·미의 체면 살리기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12. 27.

북·미는 서로 원하는 바를 알 것이다. 지난 10월 스웨덴 만남 이후 북한은 미국에 새로운 셈법을 내놓으라고 하고, ‘일단 만나자’는 미국의 요청에 묵묵부답이다. 북한은 새해에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한 단계를 밟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4월 연말 시한을 거론하고 ‘새로운 길’을 공론화했다. 최고지도자의 체면이 있으니 뭐라도 할 것이다. 두 차례 ‘중대한 시험’ 실시, ‘전략적 핵전쟁 억제력’ 표현 등으로 장거리미사일 발사와 관련된 모종의 조치를 연상하도록 했다. 김정은은 이달 초 백두산에 다녀온 뒤 말을 아끼며 신년사 내용에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지난 2년간 북·미 비핵화 대화를 이끌어온 핵심 키플레이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김정은의 ‘새로운 길’도 트럼프의 대응 방향에 따라 전개되는 양상이 달라진다. 한반도 정세는 트럼프의 상황 인식과 결정이 주요 변수인 셈이다. 내년에 트럼프의 가장 큰 목표는 대선 승리다. 국내 정치적 상황과 지지자 여론, 대선 캠페인의 득실이 대북 정책의 판단 기준이 될 것으로 짐작된다. 트럼프는 2018년 이후 북한에 아무런 양보를 하지 않았지만 북한이 장거리미사일을 쏘지 않고 핵실험도 하지 않았음을 자랑한다. 북한 비핵화를 서두르지도 않겠다고 한다. 미국 본토에 대한 위협이 없었다는 점은 트럼프의 외교적 성과임이 분명하다.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기간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고도화한 것과 대비된다. 트럼프가 김정은을 “좋은 관계”라고 적당히 띄워주고 군사행동을 제어할 수 있다면 대선 가도에 나쁘지 않다고 볼 것이다.


김정은의 처지는 트럼프와 다르다. 비핵화 결단을 대내외에 선포하고 트럼프를 두 번 만났지만 미국으로부터 얻어낸 실질적 이익은 별로 없다. 현재로선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다. 북한은 더는 기다려주지 못하겠다는 태도다.


내년 한반도 정세를 낙관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북한이 장거리미사일 발사나 핵실험으로 판을 크게 흔들 것이라는 관측, 미국의 강력 대응을 초래하고 중국·러시아도 불편해할 레드라인은 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교차한다.


서로가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는 명분이 필요하다. 양측의 기본 입장을 일단 견지하면서도 교착상태를 탈피해 협상 테이블에서 만날 구실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과거 사례를 봐도, 북·미가 격렬하게 부딪치다가도 협상을 앞두고는 체면을 세워줬다. 지난해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을 했던 빈센트 브룩스는 “북한의 ‘체면 지키기’라는 문화적 요소를 항상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들(북한)이 변화하면 우리(미국)도 변화한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고도 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일부 완화 결의안’ 시도는 북한의 군사행동에 따른 상황 악화 방지를 위한 체면 살리기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시진핑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북·미 대화의 모멘텀을 이어가기 위한 제재 완화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그러지 않고선 북한이 비핵화에 나서기 어려운 입장을 감안한 것이다. ‘비핵화 이전 최대의 압박 유지’ 입장이 분명한 미국이 일부 제재 해제에도 공개적으로 동의해줄지는 미지수다.


한·미 연합군사훈련 중단·유예가 주목받는 것은 실현 가능성을 감안해서다. 북한은 연례적인 한·미 연합훈련에도 ‘전쟁연습을 하면서 무슨 대화냐’며 강한 경계심을 드러낸다. 지난해 북·미 대화의 촉매제도 한·미 연합훈련 중단이었다. 북한은 핵·미사일 실험 중단으로 화답했다. 이번에도 이런 주고받기로 대화판을 깐다면 트럼프는 북한의 핵·미사일 모라토리엄을 유지하면서 원칙을 깨지도 않고 외교적 성과도 훼손되지 않는다. ‘대선에 끼어들지 말라’고 엄포를 놨던 트럼프도 대화 유지 틀에서 ‘북한 변수’ 관리가 가능하다.


그렇게 상황이 진전되면 비핵화 조치와 제재 완화 문제를 논의하는 협상의 본궤도에 들어갈 수 있다. 북한은 ‘제도적 안정을 위한’ 체제 안전보장과 ‘발전권을 위한’ 제재 완화를 비핵화 협상의 조건으로 요구한다. ‘원샷딜’은 비현실적이다. 비핵화 실무협상을 총괄하는 스티븐 비건 국무부 부장관은 지난주 서울에서 판문점 회동을 제안하며 “‘타당성 있는 단계’와 ‘유연한 조치’로 균형 잡힌 합의에 이를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를 확인하고, 1단계 비핵화와 일부 제재 완화를 고려할 수 있다는 메시지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어찌 됐건 시급한 일은 북·미가 너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연말·연초 고비를 넘기면 기회가 오도록 말이다.


<안홍욱 정치·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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