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가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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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가 뭐길래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12. 26.

최근 중국 광둥성 잉더(英德)시의 학부모들은 자녀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내용은 단순했다. ‘고사리손이 어른 손을 잡는’ 방식으로 가정마다 ‘ETC’를 설치해야 한다고 했다.


ETC는 고속도로 통행료 자동 결제 장치로 중국판 ‘하이패스’다. 학교가 아이들을 동원해 어른들에게 ETC 등록을 강요한 것이다. 편지에 동봉된 회신문은 한술 더 떴다. 학부모 이름, 소유 차량 대수, 차량번호, ETC 단말기 설치 여부를 적어 제출하게 돼 있었다. 학부모들은 차량번호까지 조사한 것은 명백하게 사생활을 침해한 것이며, 학생들의 피교육권까지 훼손당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최근 중국 정부는 전국 고속도로의 ETC화를 추진하고 있다. 요금수납원이 있는 차로를 대폭 줄여 ETC 사용을 확대하겠다는 의도다. ETC 단말기를 설치하면 무엇보다 통행료를 내기 위해 차를 세우고 지불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 시간도 절약된다. 요금소 주변 정체를 막는 데도 도움이 된다.


중국 정부의 ETC 보급은 강제적이다. ‘고사리손’까지 끌어올 정도니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나오고 있다. 후난성 등 일부 지역의 톨게이트에서는 수납원 차로를 아예 없앴다. 


샤먼시 북역 고속도로 요금소는 “ETC 미장착 차량, 국가적 호소에 응답하지 않은 차량은 고속도로 사용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무시무시한 현수막까지 내걸었다. ETC 단말기를 설치하지 않은 차량은 매년 받아야 하는 자동차 검사도 받지 못한다. 사실상 운행금지나 마찬가지다.


중국은 이용의 편리성을 부각시키거나 할인혜택을 주는 게 아니라 온갖 방법으로 차주들을 핍박한다. 괴로운 건 운전자뿐이 아니다. ETC는 각 은행 카드와 연동해 요금을 지불하게 돼 있는데 전용카드 판매 실적 할당을 채우지 못하면 문책을 받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은행마다 카드 가입자를 끌어모으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내년 1월1일부터 중국 고속도로 요금소의 대부분 통로가 ETC 전용으로 바뀔 예정이다. 현금 및 전자페이 같은 수납원을 통한 방식은 대폭 줄인다. 충분한 준비기간 없이 이뤄진 갑작스러운 정책에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 19일에는 광둥성에 사는 뤄모씨는 구이린(桂林)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로 진입하려다 저지당했다. 차량에 ETC를 설치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고속도로 관리원은 당장 설치하지 않으면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없다고 했고, 구이린에서 다시 나올 수 없다는 협박까지 했다. 차에는 임신한 아내가 타고 있었다. 뤄씨는 실랑이 끝에 2시간 만에야 고속도로에 진입할 수 있었다.


교통운수부는 연말까지 ETC 이용률을 90% 이상 높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요금소마다 1개의 수납원 통로는 유지해야 하지만, 지방정부는 수납원 통로를 아예 없애는 방식으로 성과 달성에 나선 상태다.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해 정부가 직접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은 편리함을 내세우고 있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빅데이터 수집을 진짜 이유로 꼽는다. 4차산업 흐름 속에서 빅데이터 패권을 노리는 중국은 14억 인구를 기반으로 각종 데이터 수집에 집중하고 있다. ETC는 데이터 확보에 효과적 수단이다. 


그러나 운전자의 동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데서 발생하는 사생활 침해는 보호막이 없다. 고속도로 ETC가 아니더라도 공항, 지하철역, 기차역 등에 설치된 안면인식 카메라로 개인 사생활은 훤히 드러난다. 정보의 독점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관리 권력, ‘빅브라더’의 도래가 바짝 다가온 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를 피할 수 있는 선택권이 중국인들에게는 없다. 혹시 교통수단을 전혀 이용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모를까.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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