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수 | 한양대 교수·중동학
내일부터 무슬림들은 필생의 종교적 의무인 성지순례에 들어간다. 유일신 알라의 명령에 복종하고 철저한 자기희생을 상징하는 순례의무를 위해 전 세계 300만명의 순례객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성지 메카로 몰려들었다. 순례를 마친 10월26일에는 순례여부와 상관없이 15억명에 달하는 전체 무슬림들이 양을 잡는 희생제를 치르며 ‘이들 아드하’라 불리는 연중 최대의 종교축제를 맞이하게 된다. 새옷으로 정장하고 모스크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린다. 그런 다음 이웃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새로운 공동체 정신을 되새긴다. 적의감은 사라지고 채권·채무관계가 정리되며, 종파, 부족, 정치적 갈등을 딛고 하나됨을 확인하는 가장 의미있는 시간을 갖는다. 화해와 용서를 실천하는 축제다.
순례의식은 아브라함의 고사에서 비롯됐다. 잘 알려진 대로 구약이나 코란 모두 그들의 공통조상은 아브라함이다. 코란의 기록에 의하면 신앙심이 깊던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희생제물로 바치라는 알라의 명을 받들게 된다. 구약에서 신의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의 아들이 적자인 이삭인 점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이슬람에서도 물론 이삭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이스마엘을 장자의 개념으로 보아 희생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이슬람 최대 축제 희생제 축하 기도 중 천진한 표정으로 사과를 먹고 있는 소녀 (출처: 경향DB)
이삭의 가문에서 예수가 탄생해 유대교와 기독교의 뿌리가 되고, 이스마엘은 아랍인의 조상으로 후일 그 가문에서 무함마드가 등장하여 이슬람을 완성하게 된다. 두 종교가 형제관계인 셈이다. 아브라함 부자의 신앙을 확인한 알라가 이스마엘 대신 양을 제물로 바치도록 했다는 코란의 고사에서 순례가 끝나는 날 모든 무슬림들은 양과 염소 같은 동물을 잡아 신에게 희생제물로 바친다. 보통 축제 이틀 동안 약 1억마리 이상의 동물들이 도살된다. 이처럼 순례축제는 철저한 자기희생과 함께 신에게 용서를 비는 참회 의식이다.
보통 도살된 고기는 삼등분하여 3분의 1은 가족들이 먹고, 3분의 1은 평소 신세졌던 친구나 친지들에게 보내고, 나머지 3분의 1은 도움이 미치지 못하는 소외계층과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나눈다. 이러한 분배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슬람사회의 미덕으로 남아있다.
동물을 잡는 방식도 먼저 기도하고 신의 이름으로 잡는다.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경동맥을 단숨에 자르며, 생명의 상징인 피는 취하지 않는다. 심지어 가죽과 털까지 깨끗하게 처리하여 자선단체에 희사한다. 이러한 생명존중 사상과 생태질서관은 1400년 이슬람 역사에서 일관되게 지켜왔던 미덕이고 종교적 핵심이었다.
그런 정신에 비추어 보면 리비아 내전 사태나 최근 시리아에서 정부군과 반군 양측에서 경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동족 학살 행위는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메카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순례는 정보교류, 거대한 교역시장, 새로운 정치담론과 여론 형성의 장이 마련되는 공간이자 시간축이다. 무엇보다 이슬람 세계의 갈등과 내분이 해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왔다. 수니·시아파는 물론 전쟁 중인 적대적인 세력들이 모두 함께 순례예배를 드리며 화해의 악수를 청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약속과 다짐은 알라의 집인 메카의 카바신전에서 신의 이름에 걸기 때문에 절대적 당위성을 갖는다. 오랜 레바논 내전, 팔레스타인에서 가열되는 강경파 하마스와 온건파 파타의 갈등, 심지어 8년을 끌었던 이란·이라크전쟁 중에도 성지순례는 멈추지 않았으며, 순례기간 사우디아라비아 왕이 주관하는 전 세계 이슬람 지도자 회의에서 집단 간-국가 간 타협과 중재가 모색되기도 했다.
이런 전통에 따라 시리아 문제 유엔 특사인 라크다르 브라히미가 순례기간 휴전을 제의하였고, 일촉즉발의 전쟁위기까지 갔던 터키와 시리아 간에도 이 기간 동안 전투모드보다는 휴전모드가 강조되고 있다. 이번주 희생제 축제를 맞으면서 끝없는 살육과 보복의 악순환 고리가 깨어져 화해와 공존의 분위기가 새롭게 정착되기를 간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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