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수 | 한양대 교수·중동학 lee200@dreamwiz.com
중동 최대의 강국인 터키가 지난 1세기간 유럽 짝사랑을 마감하고 아시아로 돌아올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터키는 국토의 3%가 유럽에 속해 있다는 점을 내세워 아시아임을 포기해 왔다. 올림픽 예선이나 월드컵 축구 경기도 유럽팀으로 출전하고, 아시안게임에는 출전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문화적으로 터키는 분명 아시아 민족이다. 터키 국사교과서 1장은 흉노로부터 시작된다. 그 다음 돌궐, 위구르, 셀주크 튀르크, 오스만 제국, 터키 공화국 역사로 이어진다.
터키는 2004년 유럽연합 가입을 위한 협상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민족 자존심을 건드리는 요구까지 참아가면서 유럽화의 길을 택했다. 물론 유럽연합 가입을 강력히 추진하는 배후에는 지난 80여년간 국가권력을 독점해 왔던 무소불위의 군부와 세속주의자들의 기득권을 근원적으로 뒤바꾸겠다는 터키 국내정치의 이해관계도 분명 숨겨져 있다.
세 차례의 군부 쿠데타를 통해 사권분립의 한 축이었던 군부의 정치개입을 차단하고,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로 고질적인 경제난을 가중시켰던 기성 정치권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유럽 수준의 민주화와 인권, 경제개혁이라는 명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그 결과 정의개발당은 2002년 집권한 이래 벌써 11년째 선거를 통해 안정적으로 정국 운영을 주도하고 있으며, 최근 5년간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도 8%대의 실질성장률을 기록하면서 G16 국가로 급부상했다.
그러자 터키 국민들의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최근 터키 보아지치 대학 유럽연구소가 전국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놀랄 만한 변화가 나타났다. 2003년부터 오늘날까지 10년간 터키를 유럽으로 생각하는 국민들은 70%에서 47%로 줄어들었다. 처음으로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이는 그동안 프랑스 전 대통령 사르코지나 독일 총리 메르켈 등 유럽국가 지도자들이 협상과정에서 보여준 부정적인 터키관에 대한 불만의 반영이다. 유럽연합이 됨으로써 이슬람 종교의 약화와 젊은 세대들의 도덕적 타락을 걱정하는 국민들도 67%에 달해 10% 이상 증가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바라본 보스포러스 해협 (출처; 경향DB)
나아가 응답자의 32%는 터키가 아무리 노력해도 유럽연합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했고, 21%는 자신의 생애 중에는 유럽연합 가입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부정적 견해를 밝혔다. 2003년 유럽연합 가입의사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74.4%가 찬성표를 던졌던 터키 국민들의 유럽 인식이 근원적으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그럼 그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 글로벌 경제상황과 유로존 위기를 겪으면서 유약한 유럽연합의 일원이 되겠다는 의지가 약해진 점을 들 수 있겠다. 둘째는 아랍 민주화 이후 새로운 중동의 강자로서 터키가 펼치는 자신감 있는 국제외교와 이슬람과 민주주의의 성공적인 접목을 통해 새로운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유럽인이 갖고 있는 뿌리깊은 반터키 정서에 대한 터키 국민들의 반감과 실망감이 극대화된 결과로 보인다. 그동안 유럽이 가장 두려워해 왔던 점은 유럽 최대 규모인 8000만 터키 인구의 자유로운 유럽 노동시장 접근과 이주였다. 하지만 여론조사 결과는 유럽연합에 가입하더라도 노동력 이동을 하겠다는 응답자는 고작 14%에 불과했다. 이제 터키인들은 국내에서의 삶에 만족감과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은 기독교 문화권인 유럽연합이 이슬람교를 믿는 터키를 받아들임으로써 동서양 화해는 물론 중동 평화를 통해 글로벌 안정을 가져올 수 있는 문명사적 사건으로 지구촌의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터키의 아시아 회귀는 서구와 이슬람이라는 두 세계의 역사적 갈등이 쉽게 치유되기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차라리 동양의 정신에 유럽의 옷을 걸친 터키가 두 세계의 완충역할을 하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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