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띄는 책 한 권이 있다. 야마카와 슈헤이(山川修平)의 <인간의 요새>(2003년). 광주에 거주하는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에 관한 내용이다. 정확히 말하면 태평양전쟁 시 일제 식민권력의 만행으로 한국에서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로 연행돼 무보수로 중노동에 시달린 근로정신대 소녀들 이야기다.
저자는 대학시절 소설을 발표하는 등 창작활동에 심취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 후 출판사 일에 끼어들였다 출판사 경영에 실패하자 주택산업 관련 저널리스트로 변신한다.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시민이 당시 일본에서 혹독한 생활을 강요당했다가 전쟁 후 무일푼으로 귀국해야 했던 동시대의 소녀들 인생을 조명했다. 그리고 한·일관계의 역사적 굴레에 갇혀 허우적대는 그녀들의 비극을 접한 일본인으로서 지원단체와 피해자들의 재판투쟁 배경과 양상, 은폐된 권력과 자본의 결탁 구조를 파헤쳤다.
근로정신대 출신 양금덕 할머니가 일본의 후생연금 탈퇴수당 99엔 지급에 관련해 기자회견하고 있다. (경향DB)
어째서 당시의 버블 경기와 그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 수밖에 없던 보통 일본인이 조선 여자 근로정신대 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일까? 출판사 경영으로 빚더미를 떠안은 저자는 수년간 주택회사에 몸담다가 겨우 마음의 여유를 찾아 여행지로 가장 가까운 나라인 한국을 택했다.
그와 조선 여자 근로정신대 유족의 교류가 움튼 곳은 다름 아닌 제주도. 홀로 거리를 배회하던 중 다방에 들르는데, 거기에서 소박한 한국인과 조우한다. 그런 만남이 없었다면 한국 방문을 되풀이하지도 한국에 매료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생각건대 여행자 눈에 비친 풍경은 새로울지라도 모든 장면이 맘에 들 리 없다. 또한 유복한 환경에서 다양한 혜택을 누리는 사람과 만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한·일관계에 드리워진 암영 속에서 불우한 경험을 떨치지 못한 채 사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그는 한·일 간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운명과도 같은 우연한 만남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도 “일본 국민은 이웃 나라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하다. 조선 여자 근로정신대 문제 하나 해결할 수 없는 원흉은 일본인의 무지에 잠재하고 있다”고 한탄하는 장면에서 한국인과의 만남을 통해 역사적 인식을 달리하며 자성하는 일본인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근로정신대 소녀들이 끌려간 경위와 시대적 배경을 탐색, 노동현장에서 혹사당하는 그녀들의 피착취 현실이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지를 샅샅이 들춰내는 글쓴이의 붓끝은 면도날처럼 예리하다.
눈물 훔치는 근로정신대할머니 (경향DB)
자본가의 노동자 탄압 양상 혹은 인간적 처우와 생존권 추구를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예로 들 때 작가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 가공선>이 떠오른다. 한데 실제로 근로정신대 소녀들은 일본 대기업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임금도 받지 못한 채 생활했다. 그리고 세월은 흘렀지만, 지금 거대한 자본권력에 저항하며 소송을 제기해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공간과 배경은 다르다고 하나 고바야시 다키지가 <게 가공선>에서 주장한 의미와 노동자의 투쟁 양상이 근로정신대 소녀들에게 투영돼 되살아나는 듯 비치는 것은 왜일까?
미쓰비시 여성 근로정신대원들이 기숙사에서 출근하고 있다.
8월23일 광주지법 204호 법정에선 나고야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 관련 3차 심리재판이 열렸다.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을 도와온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 여자 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 분들이 3차 재판 참관을 위해 광주를 방문했다.
이분들은 귀국하자마자 다시 나고야에서 도쿄를 왕래하며 도쿄 시나가와역 부근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우리 할머니들을 돕기 위해 전단을 돌리고, ‘아침이슬’을 부르며 금요행동에 나설 것이다. 신일철주금 징용 피해자 배상금 지급 판결 후, 일본 외상이 “배상 문제는 끝났다”며 배상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상황에서 한·일 현안을 풀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할 양국 시민세력의 연대와 교류 확대에 화두를 던지는 실천적 운동임이 분명하다.
김정훈 | 전남과학대 교수·일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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