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오후 경찰이 백악관 앞 바리케이드를 들이받은 뒤 의회의사당 앞까지 검문에 불응하고 달아난 한 여성 운전자를 총으로 사살한 사건을 본 미국 사람들은 대개 경찰이 그럴 수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존 베이너 하원의장 등 당시 의회 내에서 연방정부 폐쇄에 대한 해법을 토론하고 있던 의원들은 여성이 사살된 뒤 일제히 박수를 치며 의사당 경찰대와 비밀경호국의 노고를 치하했다. ‘적’으로부터 의사당을 무사히 지켜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데 기자를 포함해 ‘총의 문화’ 속에서 자라나지 않은 비(非)미국인들은 ‘굳이 죽이기까지 해야 했을까’ 하는 느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지난해 10월 미 조지아주 포트베닝에서 열린 청소년사격클리닉에서 한 청소년이 미 육군 장병에게 M4 소총 사격법을 배우고 있다. 포트베닝 _ 주니어슈터 홈페이지(출처 : 경향DB)
이 운전자가 비무장 상태였으며, 한 살 난 아기를 차에 태우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미국인들의 반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경우엔 차량 자체를 무기로 보기에 충분했다’며 경찰 대응이 정당했다는 반응이 여전히 많았다. 아직 범행동기가 나오기 전이었다.
하지만 유가족들의 증언으로 이 여성이 산후우울증을 앓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 누리꾼들 사이에서 ‘차바퀴에 총을 쏘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경찰의 과잉대응 논란이 일면서 유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법적 대응을 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여성은 미리암 캐리(34)라는 흑인 여성으로, 코네티컷주에 살던 치위생사였다. ‘그 시간에 왜 워싱턴에 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오바마가 자신을 스토킹한다고 믿었다’는 가족들 얘기를 보면 제정신이 아닌 채로 백악관 주변에 왔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정신이상자 여부와 무관하게 논의의 본질은 공권력의 집행이 정당했는가에 맞춰지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미국의 수도는 약간의 이상 행동에도 공권력은 생각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고 ‘적’으로 간주해 방아쇠를 당길 준비가 된 긴장 상태에 있는 도시라는 점이 잘 드러났다. 일반인들조차 총을 쉽게 집어드는 사회에서 법 집행자들이 총기 사용을 특별히 자제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오늘도 워싱턴 시내를 걷는 게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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