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관 ‘알바’ 25년 선배의 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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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대사관 ‘알바’ 25년 선배의 충고

by 경향글로벌칼럼 2013. 5. 23.

주미 한국대사관에는 각 부서마다 몇 명의 젊은 인턴 직원들이 있다. 이들은 무보수로 일한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으로 얼룩져버린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 기간에는 30여명의 교포·유학생들이 수고비 정도의 사례를 받고 임시 인턴으로 일했다.


나도 한때 이들처럼 대사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대통령 방미 행사 때 임시로 일한 적이 있다. 한국이 마르코스 독재 치하의 필리핀과 같은 대접을 받던 5공 정권과 직선제 개헌에도 여전히 정치 후진국 취급을 받던 6공 시절이었다. 당시 대사관에서 일하는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취업 걱정을 하지 않던 시절이라 굳이 ‘스펙’을 쌓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일하고 돈받는 아르바이트 이상은 아니었다.


대사관에서 신문에 가위질하는 일을 하다가 전두환 정부를 지지하는 내용의 유학생 기고문을 워싱턴포스트에 싣기로 했으니 이름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 일을 그만뒀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는 수행단을 태운 대형 세단을 운전하거나 프레스룸에서 한국 관련 기사를 번역해 기자단에 제공하는 일을 했다. 하루 일당이 무려 300달러였다. 당시 워싱턴 DC의 원룸 월세가 550달러였으니 나흘 일하고 두 달치 집세보다 많은 보수를 받은 셈이다.


(경향DB)


일은 무척 힘들었다. 잠도 부족했고 항상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모두들 시키는 일을 군말 없이 잘 따랐다. 대통령 행사를 위해 일하면서 느끼는 보람이나 국가에 대한 자긍심 때문은 아니었다. 큰돈을 받고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힘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때도 공무원들의 인격모독적 언행이 있었지만 인권 의식이 박약했던 탓인지 그걸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 미국 공관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젊은 세대들은 그렇지 않다. 대사관에서 일하는 게 떳떳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한국의 위상은 교민이나 유학생들이 미국 내에서 더 이상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위축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커졌다. 이들이 대사관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모국에 대한 자부심이다.


이번 대통령 방미 행사에 참여했던 교포 인턴 몇 명을 만나 왜 그 일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경험 삼아”라고 대답했다.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는 의미 있는 행사에 직접 참여한 것을 두고두고 자랑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라고 믿기 때문에 이들은 기꺼이 무보수로 인턴을 한다. 취업이나 대학원 진학 등을 위한 ‘스펙’ 때문이라는 인턴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잠깐이나마 한국 정부기관에서 일했다는 것이 자신의 경력에 유리하다고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 역시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인정하고 정부기관에서 일한 경험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음을 의미한다. 


윤창중 사건 축소은폐 규탄 기자회견 (경향DB)


윤창중 사건은 이들이 갖고 있던 한국에 대한 선망을 배신했다. 혼란스러워하는 인턴들에게 대사관은 행사를 끝내면서 이번 사건에 대해 일절 입을 열지 말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는 의혹에 버티기로 일관하면서 세월 가기만 기다리는 중이다. 피의자가 도망가는 바람에 재판이 열리기는 어렵다. 피해자나 목격자가 공개적으로 입을 열지 않으면 이번 사건은 정부가 원하는 대로 묻힐 것 같다. 정부의 이런 태도에 실망한 인턴이 있다면 ‘대사관 알바 25년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돈받고 일하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이런 인턴은 하지 마라. 이런 정부에서 뭘 배울 게 있다고 무보수로 인턴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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