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인의 평화찾기]트럼프에게 영예를, 우리에게는 주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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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동서남북인의 평화찾기]트럼프에게 영예를, 우리에게는 주권을…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11. 1.

트럼프 대통령은 10월10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5·24 제재 해제 검토’ 발언에 “그들(한국)은 우리의 승인 없이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Well, they won’t do it without our approval)”이라고 찬물을 끼얹었다. 대놓고 한국을 속국 취급하는 이 발언은 한국에서는 깊은 모멸감을 불러일으켜 반발들이 쏟아져 나왔으나, 문재인 정부를 아니꼽게 보던 보수들은 ‘쾌재’를 부르며, “거봐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하는 식의 비난을 쏟아냈다. 문정인 특보처럼 “협의라는 내용을 더 강하게 하려다 승인이라는 말을 썼을 것”이라고 둘러대봐야, 우리가 외세의 제압을 받아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고 살아온 역사를 가릴 수 없다. 그러기에 노무현 정부 이래,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를 위해 안간힘을 써온 것이 아닌가. 실은 트럼프의 망언은 우리의 ‘속국성’을 트럼프식의 노골적인 방법으로 드러낸 것이며, 우리가 당면한 역사적 과제를 가리키고 있다.

 

‘5·24조치’는 천안함 사건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낸 ‘한국’ 독자제재이며 당시는 시비가 끊이지 않았으나, 지금에 와서는 누구도 감히 비판할 수 없는 금과옥조가 되어버렸다. 어뢰의 충격파와 거품으로 1200t이나 되는 군함이 한순간에 두 동강이 났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우격다짐으로 진상으로 만들어버리고, 합리적인 비판에는 “빨갱이” “종북”으로 매도하고 봉쇄했다. 우리는 그 금줄에 칭칭 감겨 옴짝달싹 못하고 남북 공동번영의 길이 막혀 있다. 어차피 해제되어야 할 5·24조치는 유엔이나 미국의 제재와는 관계가 없는데도, 트럼프 대통령이 토를 달자, 3차례의 정상회담으로 남북이 형제처럼 돈독한 우의를 쌓아가는 것을 못 보고 재를 뿌리려 하는 인간들이 난리를 피운 것이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의 모욕을 꾹 참고 지나갔지만, 문재인 정부의 핵심과제인 ‘적폐청산’이라는 점에서 보면, ‘천안함 사건’이야말로 적폐 중의 적폐니, 이참에 거짓의 가면을 벗기는 전면적인 재조사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지난 3차례의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의 양 정상은 평화와 통일을 확신하고, 북의 비핵화 의지가 진실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남북의 정상이 서로를 믿고 신뢰하게 되었으니 평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온갖 모략과 음모, 사술이 판치는 국제정치에서도 평화와 안전을 최종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당사자들의 신뢰일 뿐이다. 대통령 선거에서도 그랬듯이 문 대통령은 우직하게 성실과 정직으로 상대를 대해왔으며, 김정은 위원장은 구김살 없는 솔직함으로 화답하면서 신뢰를 쌓아왔다.

 

북한은 그간 북·미 정상회담의 약속을 지키고 일부 핵실험장 해체와 미군 유골 반환 등을 실행해왔는데, 미국의 화답이 없다. 핵폐기의 최종 단계까지 제재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미 비핵화와 평화 의지를 명확히 하고, 1년간 핵·미사일 실험을 안 하는 구체적 행동으로 북한이 이미 대북 제재의 명분을 해소했음에도, 미국은 그에 상응하는 제재 완화를 하지 않고 있다. 미국이 경제제재의 효과로 북한의 의지를 꺾었다고 착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런 오만함과 모멸은 또다시 긴장고조와 전쟁의 길로 회귀하는 위험마저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남북, 남남의 목소리를 하나로 하여 “이제 핵·미사일 문제는 해결되니, 70년 만에 한반도 평화·번영의 시대를 실현할 차례”라고 미국을 설득하고,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남북 철도 연결 등 줄지어 기다리는 남북의 소통과 구체적인 협력사업을 시작할 차례다. 타율사관이나 사대주의에 점철되어온 우리에게 드디어 주권국가로서 자주독립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회가 마련된 것이다. 현안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인데, 우리에게는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권회복의 계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주인임’은 바로 촛불정신이며, 자주, 독립, 해방은 500년간 노예제와 식민지 지배 아래 고통받은 세계의 대다수 인민들의 소원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도 평양 5·1경기장에서의 연설에서 “이번 방문에서 나는 평양의 놀라운 발전상을 봤다. 어려운 시절에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끝끝내 스스로 일어서고자 하는 불굴의 용기를 봤다”며 그들의 고난의 시기의 투쟁을 높이 평가했다. 북한은 그 고립 속에서 민족주권을 지키기 위해 막대한 대가를 치러왔다. 해방 후 주권을 희생시키면서도 구생(苟生)을 도모해온 한국이 이제는 주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감연히 일어설 자리다. 그러나 주권회복 투쟁이 이제는 항일독립투쟁처럼 무력항쟁이 아니라, 외교적인 수단으로 하는 시대가 되었다. 평양시민에게 큰 충격과 감동을 준 문 대통령의 평양연설을 일부에서는 “북의 대변인”이라거나 “북을 찬양·고무한다”며 중상하고 있다. 그러나 남북이 서로가 서로를 대변하고 포용하고 찬양·고무하는 것이 바로 남북 화해와 평화의 시대인 것이다.

 

이제 중간선거를 맞이하는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인종주의, 반여성적 성향, 반이슬람 성향, 가짜뉴스 유포와 돌발적 언행으로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이란과의 핵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중동의 위태로운 국제관계의 균형을 깨는 이스라엘 편향적인 정책, 중국과의 부조리한 무역전쟁 등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한 행태와 대조적으로 트럼프는 북핵·미사일 문제에 있어서는 김정은 위원장과 “사랑에 빠졌다”고 낯뜨거운 표현을 하는 등 톤에 사뭇 차이가 난다. 아마도 그 배경에는 전임 정권과의 차별성 강조, 고정관념에 구애받지 않는 실리주의, ‘미국제일’과 ‘내가 제일’의 철학이 작용했겠으나, 한반도 문제에서는 건설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다만, 그 결과물은 신의나 신뢰라는 국제정치의 굳건한 기반에 서는 것이 아니기에 변덕에 의해 언제 어떻게 달라질지 몰라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다. 이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대처방법은 남북의 공조로 핵·미사일 문제 해결을 위한 교섭방안을 선제적으로 확보하고 내외 여론 속에서 남북 화해와 평화를 기정사실화하면서 트럼프를 최대한 치켜세우고, 그 공은 모두 트럼프에게 돌리고 미국의 결심을 유도하려 하는 것 같다. 한국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자, 현명한 방법이다. 우리는 평화와 번영과 통일을 얻는다면 트럼프에게 노벨상이 돌아가는 것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서승 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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