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를 생각한다
본문 바로가기
=====지난 칼럼=====/이범준의 도쿄 레터

미시마를 생각한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20. 9. 2.

도쿄대학 대학원에 다니면서 학부과정 헌법 수업을 들었다. 수업시간표에 강의실이 900번 교실이라 적혀 있었다. 처음 이곳에 들어서는데도 눈에 익었다.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와 도쿄대 전공투가 토론을 벌인 50년 전 그 장소다. 이 토론회는 전공투가 제안하고 미시마가 수락했다. 극우와 극좌로 불리는 미시마와 전공투는 일본 사회를 변혁한다는 같은 목표가 있었다. 토론회를 앞두고 “미시마를 논파하여 연단에서 자결케 하라”는 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양측은 서로를 설득하지도, 일본 사회를 설득하지도 못했다. 이듬해 전공투는 사라졌고 미시마는 할복했다.

 

미시마가 죽은 1970년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김윤식이 도쿄대학 외국인 연구원으로 있었다. 미시마 죽음에 관한 평론을 한 편 썼는데, 세월이 흘러 괜한 일을 했다고 적었다. “미시마라는 작가가 절복을 했든 말든 나는 공동묘지와 같은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 내 몸을 죽은 자에게 빌려 주고, 그들을 잠시 살려내어 대화나 하면 되지 않았을까. (중략)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사고가 아닌 느낌을 써서라고 했다. 마르크스주의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도 인용했다. “나는 연구자인 까닭에 사고하는 것은 팔아먹지만 느낀 것은 팔아먹지 않는다”는 글이다.

 

미시마는 쿠데타를 계획하고 자위대를 선동했으나 실패하자 자살했다. 이를 문학적 죽음이라 부르던 이들에게 이의를 말한 도쿄대학 법학부 교수가 있다. 사카모토 요시카즈는 “본래 정치적 의미를 가진 행위를 전적으로 문학이나 미학의 차원으로 비정치화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이라고 했다. 이에 김윤식이 “사카모토 교수의 비판의 예리함을 내 나름으로 엿본 것은 지금 생각해도 통쾌하다”며 “학문이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앞에 서서히 잠겨들었다”고 기억했다. “그 덕분에 <한국문학사>(1973, 김현 공저) 집필에서 정치·사회경제사의 중요성을 도입할 수 있었다”고 했다.

 

도쿄대학 법학부 헌법판례 교재에 미시마 이름이 나온다. ‘필명 미시마 유키오로 알려진 피고 히라오카 기미타케’라고 시작한다. 실존 정치인과 전부인이 모델인 <연회는 끝나고> 사건이다. 1964년 1심에서 미시마에게 손해배상금 80만엔이 선고됐다. 이후 정치인이 죽었고 유족이 미시마와 합의했다. 이 판결은 유미리의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출판 금지하는 2002년 최고재판소 판결로 이어진다.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미시마는 자결 1주일 전 인터뷰에서 “그 판결 이후로 재판이란 걸 믿지 않게 됐다”고 했다. 대장성 관료 출신인 그는 이때 제도언어를 더욱 불신하게 됐다.

 

미시마와 전공투 토론회를 다룬 기록영화가 최근 개봉했다. 미시마가 말한다. “나는 일본인이다. 일본인으로 태어나 일본인으로 죽는다. 이 한계를 벗어나고 싶지도 않다. 이런 나를 가엽다 여길 테지만.” 전공투가 묻는다. “그렇다. 측은하다. 국적 같은 건 당초 있지도 않았다.” 미시마가 답한다. “자넨 국적이 없을 테지. 자유인인 자네를 존경한다. 그렇지만 내겐 국적이 있고 일본인에서 못 벗어난다. 숙명이다.” 이제 초로(初老)인 전공투 멤버는 “사람과 사람 사이 매개로 언어가 힘을 가진 마지막 시대였다”고 했다. 논쟁이 난무하는 한국과 토론이 사라진 일본 사이에서, 미시마를 생각한다.

 

<이범준 사회부 기자>

반응형

'=====지난 칼럼===== > 이범준의 도쿄 레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화를 위한 일본어  (0) 2020.08.05
신중함이라는 병  (0) 2020.06.10
개인의 죽음  (0) 2020.05.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