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함이라는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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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이범준의 도쿄 레터

신중함이라는 병

by 경향글로벌칼럼 2020. 6. 10.

일본인이 친절하다고 말하는 한국인은 관광객 정도다. 이곳에 살면서는 오히려 불친절하다고 느낀다. 항공권 발급시간이 10초 지났다고 예약한 비행기 대신 다음 항공편 구입을 허리 숙여 알려주고, 태풍으로 철로가 끊겨 숙소에 전화하니 상냥하게 위약금 청구서를 보내온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일이 조금씩 어려워진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주문 마감시간에서 1분이 지났다고 추가주문을 받지 않는 식당 주인이나, 곱빼기 회덮밥을 보통으로 잘못 만들었음을 알고는 그대로 버리는 주방장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일본인 마음에는 무엇보다 규칙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일본에는 길이 2m를 조금 넘는 횡단보도들이 있다. 많은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신호를 기다린다. 신호는 보행자를 위한 것이라며 차가 없으면 건너는 서구 등과 다르다. 사진은 도쿄 분쿄구에서 지난 7일 촬영했다. 이범준 기자


일본의 코로나19 대응이 실패라는 근거가 속속 나오고 있다. 연구 결과 코로나19를 옮기는 시기는 대체로 증상 발현 이틀 전부터 증상 이후 엿새까지다. 일본에서는 체온 37.5도가 나흘 동안 지속돼야 검사 신청 대상이고, 검사를 받으려면 이틀이 더 걸린다. 전파력이 사라진 다음이다. 일본 정부는 감염을 거의 막지 못했다. 최근에야 검사 기준을 풀었지만 상황은 그대로다. 6월 하루 PCR 검사 수는 많은 날이 3221건, 적은 날은 1276건이다. 코로나19 사태가 끝날 때까지 검사가 극적으로 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일본인 친구가 봄부터 말했다. 규칙을 뒤집는 일이 일본에서는 어렵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한국이 코로나19 방역에 성공한 이유로 2015년 메르스 경험을 꼽는다. 당시 한국에서 186명이 감염돼 38명이 숨졌다. 일본은 환자가 없었다. 정작 메르스에 바탕을 두고 규칙을 만든 곳은 일본이다. 치사율 35%인 메르스 같은 상황에 대비해 PCR 검사를 억제했다. 중증으로 발전하면 치료해 의료붕괴를 막고 목숨을 구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전파력은 강하지만 치사율은 낮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에 한국은 드라이브 스루를 고안해 검사에 나섰고, 이태원 감염에는 신속하게 익명검사를 시작했다. 일본은 이제야 드라이브 스루 검사 매뉴얼을 시험하고 있다. 


일본인의 계획 세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일본 변호사단체 회장단 선출을 참관한 적이 있는데 임기 2년 치 이사회 날짜를 이날 잡았다. 다다음해 선약들이 있어 맞추는 데 한참 걸렸다. 은행에서는 계좌개설을 설명하며 수천쪽짜리 매뉴얼을 올려놓았다. 대신 경험하지 못한 일, 준비하지 못한 일에 취약하다. 긴급재난지원금도 한국은 2주 만에 97%가 받았다. 일본은 경제 타격이 가장 크다는 삿포로시 주민도 70%가 지난주까지 받지 못했다. 준비 없이 지원금 온라인 신청을 받겠다고 했다가 공무원들이 신청서를 출력해 재입력하는 일도 있었다. 많은 곳에서 온라인 접수를 중단했다. 


19세기 변방국가 일본을 세계무대에 올려놓은 신중한 태도가 감염병 시대를 맞아 단점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인의 일관성은 한국인의 유연성과는 다른 여전한 장점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신중함이 아니라 무능하고 부도덕한 정권까지 지켜만 보는 태도다. 일본헌법 12조는 국민에게 말한다.“이 헌법이 국민에게 보장하는 자유 및 권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국민은 부단히 노력하여야 한다.” 권리나 자유는 주장·행사하지 않으면 사라지므로, 국민 스스로가 정부의 침해에 맞서라는 선언이다. 때로는 신중도 병이다.


<이범준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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