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김정은 위원장이 용단을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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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세상읽기]김정은 위원장이 용단을 내려야 한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12. 11.

지난봄 광활하게 보였던 북한 비핵화 공간이 겨울로 접어들면서 시야가 탁해지더니 갑자기 눈에 띄게 축소됐다. 판문점과 평양에서의 남북정상회담,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등으로 훈풍이 돌던 한반도가 어느새 짙은 매연으로 채워지고 있다. 방치할 경우 한반도라는 공간 속에 사는 수천만명의 생명까지 위험해진다. 서둘러 매연을 빼내고 굳게 닫혀있는 공간도 최대한 열어야 한다.

 

북한 비핵화를 ‘북한 내 일체의 핵무기와 플루토늄·고농축 우라늄 등과 같은 핵물질의 완전한 제거 또는 국외 이전, 이와 관련된 재처리 및 농축시설 등의 폐기, 그리고 핵무기 제조 등에 관여한 과학기술자의 소개(疏開)’로 정의한다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임기 내에 비핵화를 달성하기란 불가능하다. 동네 이삿짐 옮기듯 핵무기와 핵물질을 이전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남북한 간 핵무기 비대칭성이 오랫동안 남아 있을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우려가 결코 과장이 아닐 듯하다.

 

돌이켜보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는 애당초 과욕이었다. 그래서일까. 조윤제 주미대사는 지난 11월 취임 1년 인터뷰에서 “모든 것을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려서 큰 시간표 안에서 일괄적으로 타결했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것 같다”며 “70년간 쌓여온 불신과 적대관계가 하루아침에 신뢰 관계로 바뀌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 대사는 영변 핵시설만이라도 서로 합의하고 뒤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잠금장치를 하자고 제안했다. 정부 내에 조 대사만 이런 시각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 중국에 이어 미국의 세 번째 핵무기 위협국인 북한의 영변 핵 단지는 ‘주체 조선’ 핵무기 개발의 상징적 장소이다. 핵 관련 건물만 390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미국의 상응조치를 조건부로 영변 핵시설의 영구폐기 의사 표명에 한 걸음 더 들어가서 검증까지 받을 용의가 있다고 최근 보도됐다.

 

영변 내 원자로 및 관련 시설의 가동을 중단(shut-down)하고서 핵물질을 완전히 제거(closed-down)한 후에 주요 장비의 부품들을 제거하거나 작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decommissioned)이 현실적 비핵화의 지름길이다. 다시 말해 영변 내 핵무기 제조와 농축 및 재처리 관련 시설을 없애고서 ‘(공원, 녹지용) 그린 필드’ 또는 ‘(해체 폐기물 저장소 용도) 브라운 필드’로 변경할 수만 있어도 획기적 진전을 이루는 셈이다. 영변 시설의 불능화만 달성할 수 있어도 트럼프가 언급한 ‘비핵화 20%’ 수준에 도달하는 미니 비핵화(mini-denuclearization)를 이루는 효과는 있다.

 

그럼에도 비핵화가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6개월째 이렇다 할 진전도 없이 피로현상을 지나 심폐소생술(CPR)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골든타임을 놓칠 경우 북·미관계는 물론 남북관계에도 재앙이다. 공교롭게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지난 11월 이사회 보고에서 영변 원자로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관측됐다고 발표했다. 통일부 장관도 지난 4일 북한의 핵 활동이 완전히 중단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모두 사찰단이 영변을 방문해야 확인 가능하다.

 

그러나 북한은 2009년 4월 IAEA 사찰단을 추방한 후 이들의 재방북을 일절 허용하지 않고 있다. 비핵화의 출발점인 사찰은 원칙적으로 서로 합의된 시설, 인력 등에만 국한되며, 핵무기 사찰은 IAEA 권한 밖의 일이다. 북한이 사찰관의 방북을 허용하더라도 이들이 마음대로 집 안 곳곳을 다니면서 딱지를 붙이는 집달리는 아니다. 무엇보다 북한이 군사시설까지 조건 없이 사찰을 허용할 리가 만무하다. 핵무기 접근은 김 위원장의 용단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트럼프와의 진검승부를 앞두고 있는 김 위원장이 더 이상 좌고우면하지 말고 약속대로 방남하여 비핵화에 대한 확고부동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정공법이다. 김 위원장이 리오넬 매시처럼 좁은 공간을 절묘하게 비집고 뚫고 나가는 묘기까지 선보이길 기대하진 않지만 서울 방문을 열망하는 사람들만큼은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한다.

 

<이병철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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