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시위 사태를 보면서 뜻밖의 뉴스에 눈이 쏠렸다. 학창 시절 큰형님으로 여겼던 성룡(成龍·청룽)이 시위가 한창이던 지난달 중순 중국 소셜미디어 웨이보에서 ‘14억명이 오성홍기의 수호자다’ 캠페인에 동참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또 다른 형님 주윤발(周潤發·저우룬파)은 홍콩 시위에 침묵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스스로 ‘아재 인증’을 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둘의 엇갈림이 홍콩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싶어, 글을 쓰기로 했다. 요즘은 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하지만, 아재에게 익숙한 한글식 발음으로 풀어가겠다.
아재의 학창 시절 성룡은 추석과 설 극장가의 단골손님이었다. <폴리스 스토리> <용형호제> 시리즈에서 대역을 쓰지 않는 성룡의 고난도 액션은 현란했다. 액션영화였지만 잔인한 장면은 없다시피 했고, 웃음까지 적절히 섞여 영화를 보고 나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따거(大哥)’가 큰형님을 뜻한다는 말도 성룡의 영화를 통해 알았다. 영화를 찍다가 그가 크게 다쳤다는 뉴스를 보고 낙담했던 기억도 난다.
그랬던 성룡이 중국 관영방송을 통해 “중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며, 오성홍기는 전 세계인의 존경 대상”이라고 했다. 시위대가 오성홍기를 끌어내린 것에 격분해 한 발언이라지만,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는 홍콩 경찰 편을 드는 따거의 모습은 낯설었다. 과거 뉴스를 찾아보니, 그는 중국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이며, 2009년엔 “중국인은 강력한 통제를 받아야 한다. 지나친 자유는 홍콩과 대만처럼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1989년 톈안먼 시위 때 학생 지지 콘서트까지 열었던 그는 어떻게 친중 인사가 됐을까.
또 다른 형님 주윤발은 어떤가. 발목 근처까지 내려오는 롱코트와 선글라스, 비장한 표정으로 더러운 배신자를 처단하는 형사나 킬러의 모습으로 아재의 기억에 남아 있다. <영웅본색> <첩혈쌍웅>에서 그는 수십발의 총알을 맞아도 죽지 않는 불사신이었다. 반드시 악당을 처단하고 복수를 완성한 후에야 비장하게 눈을 감았다. 아재의 고교 시절, 그를 따라 수많은 청소년들이 다리가 짧아도 롱코트를 입고, 담배도 못 피우면서 성냥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가 CF에서 어색한 한국어 발음으로 “싸랑해요”라고 했던 청량음료는 불티나게 팔렸다.
그랬던 주윤발은 입을 닫고 있다. 2014년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며 벌어진 ‘우산혁명’ 시위 때 “학생들은 이성적이고 용감하다. 정부가 시민과 학생들이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면 위기가 끝날 것” “평화시위에 무력대응은 필요 없다”고 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대조적이다. 우산혁명 때 시위대 편을 들었다가 중국 당국이 작성한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관측만 나온다.
시위 사태로 갈라진 홍콩 연예계를 따져보자는 것은 아니다. 둘로 나뉜 홍콩 영화계의 모습, 한때 아시아 할리우드로 불렸던 홍콩 영화계의 몰락은 영화산업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가령 1980~90년대 홍콩 영화는 하나의 장르였다. 할리우드 영화의 정교함에 비할 순 없었지만, 독특한 유머와 다소 허황된 액션은 나름의 스타일을 창조했다. 그런데 지금의 홍콩 영화는 예전의 명성을 잃었다. 기술은 발전하고 스케일은 커졌지만 재기가 사라졌다.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하던 터에 두 사람의 소식을 계기로 나름의 추론을 내리게 됐다. 홍콩 영화의 몰락은 1997년 중국 반환 이후 경직된 홍콩 사회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 ‘일국양제’를 부정하는 중국 당국이 본토와 다른 홍콩의 자유분방함을 억눌렀고, 그 여파가 영화에까지 미친 것은 아닐까. 최근 홍콩 영화 중 중국 민족의 우수함을 암시하는 국뽕 영화가 많은 것도 이런 분위기와 연관됐을 것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지난 3일 중국 당국 블랙리스트에 오른 연예인이 최소 55명에 이른다며 “중화권 연예인들은 중국 중앙정부에 대한 지지나 애국심을 표현하지 않았을 때 그들이 치러야 하는 중대한 ‘대가’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두 따거의 선택도 강요된 것일지 모른다.
홍콩 영화계의 문제는 단순히 대중예술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력이 억눌린 사회의 앞날은 어떻겠는가. 송환법은 철회됐다지만, 중국 당국의 경직된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홍콩 영화, 홍콩 사회의 봄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로 몸살을 앓았던 게 엊그제 일이다. 그래서일까. 성룡이, 주윤발이, 그리고 홍콩이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용욱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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