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트럼프와 김정은, 아직도 사랑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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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아침을 열며]트럼프와 김정은, 아직도 사랑한다면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3. 18.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베트남 하노이 만남 이전에 친서 외교가 있었다. 트럼프에겐 너무도 사랑스러웠던 편지. 어느새 ‘꼬마 로켓맨’은 ‘위대한 지도자’로 바뀌었다. 트럼프의 하노이로 가는 길, 미국 내 다수가 김정은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덜컥 그의 손을 잡지 않을까 걱정했다. 트럼프는 ‘여태껏 실패만 한 것들이 뭘 알아. 협상은 나한테 맡겨’라는 태도였다. 김정은의 66시간 기차 여행은 설렘과 기대로 가득했을 것이다.


하노이에선 가망 없는 제안들이 오갔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봤다. 트럼프는 영변을 포함한 모든 대량살상무기(WMD)와 생산시설을 완전히 폐기해야 유엔 제재를 해제할 수 있다고 김정은을 설득했다. 김정은은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을 어렵게 하는 제재 몇 개만 풀어주면 ‘북한 핵개발의 상징’인 영변을 폐기하겠다고 했다.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영변 이외 시설은 대상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점심도 먹지 않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빈손으로 돌아섰으니 전 세계가 놀랐다. 그럼에도 2차 정상회담 결렬이 파국으로 평가되진 않았다.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됐고, 얼굴 붉히지 않고 돌아섰으니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가 아니냐는 것이다. 훗날을 기약할 수 있으리라고 봤다. 하노이 회담 후 20일이 지났다. 지금 서로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오른쪽)과 최선희 부상이 1일 새벽(현지시간) 2차 북·미 정상회담 북측 대표단 숙소인 베트남 하노이 멜리아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회담 결렬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하노이 _ 연합뉴스

트럼프 정부는 전략을 재수정하지 않았다. 협상의 문턱을 올리면 올렸지 내리진 않았다. 실무협상을 이끈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우리는 점진적 비핵화를 하지 않을 것” “북한이 WMD와 관련 프로그램 제거를 전적으로 약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계적’이란 표현은 지워버렸다. 만날 생각은 있으니 현명하게 결정하란 얘기다. 북한은 15개월간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해서 비핵화 의지를 충분히 보여줬고, 영변 폐기를 약속했다고 반박한다. 그런데도 제재를, 전부도 아니고 몇 개만 풀어달라는데 안된다면 만나봐야 무슨 얘기를 하겠냐는 식이다. 미국의 셈법, 북한의 셈법은 평행선이다. 지금, 위험한 교착 상태임을 직감케 한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진다. 두 사람의 사랑도 변하는 것일까. 트럼프는 ‘밀당의 귀재’를 자처한다. “나는 거래를 하는 사업으로 수십억달러를 벌었다. 협상은 내가 잘하는 일”이라고 호언하는 트럼프에게 협상은 그의 정체성과 다름없다. 남들은 이쯤에서 되지 않을까 할 때, 던져버리는 ‘노딜의 기술’을 선보인다. 그는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중대 전환점이 된 합의를 줄줄이 깼다. 냉전시대 군비경쟁을 종식시킨 미소의 1987년 11월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파기해 유럽 안보 불안을 고조시키고, 이란 핵 합의 탈퇴로 중동 정세를 흔들었다.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 등 사례는 널려 있다. 실상 그는 세계 평화에 쿠데타를 번번이 일으키는 인물이다.


트럼프가 있던 합의는 잘 깨지만 새로운 합의 만들기에는 성과가 시원찮다. 상대를 협상장에 끌고들어온 뒤 결정적 순간, 상대가 감당하기 어려운 제안으로 놀라게 하는 것이 ‘거래의 기술’일지는 모른다. 우군이 별로 없는 북한엔 강하게 나갈수록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트럼프도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길을 달려왔다.


미국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설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일부 비핵화로 제재 완화를 얻어낸 뒤 돌변하는, 북한의 ‘먹튀’에 미국의 조야가 우려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선 비핵화, 후 제재해제’를 고수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더 분명하다. 과거의 전철을 답습하지 않고 비핵화를 달성할 방법은 있을 것이고, 이를 찾아야 한다. 크고 빠른 걸음으로 가려고 해도 다리는 신체조건이 허락되는 선에서만 최대로 뻗을 수 있다. 잘못하면 가랑이가 찢어지고 뛰기는커녕 걷지도 못할 수 있다. 한 발을 크게 뻗은 다음, 또 한 발을 크게 내디딜 수밖에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북·미의 요구 수준을 조정하는 일이다. 미국은 더 작게, 북한은 더 크게 가야 한다. 북한은 미국의 한 방 전략을 판깨기 전략과 같은 말로 인식한다. 미국의 위협에 대한 대응 수단으로 핵무기를 만든 만큼 마지막 도장을 찍을 때 내놓을 카드로 본다. 이를 비핵화 의지가 없다고 단언하긴 곤란하다. 북한도 트럼프라는 말만 나오면 으르렁대는 미국 야당이 빈손으로 귀국한 트럼프를 칭찬한 이유를 곱씹어야 한다. 영변만으로는 트럼프가 움직일 공간이 없다고 봐야 한다. 하노이 이후에도 서로를 신뢰한다는 트럼프와 김정은이 여전히 사랑하는 사이라면 말 대신 증표를 보여줘야 할 때다.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출발이다.


<안홍욱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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