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다 하루키 | 도쿄대 명예교수·번역 | 고영득 기자 godo@kyunghyang.com
1945년 8월15일 방송에서 일왕은 “만세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고 말했다. 9월4일 제국의회 개회식에선 “평화국가를 확립해 인류의 문화에 기여하길 바란다”는 내용의 칙어를 내렸다.
어떤 의도로 한 발언인지는 몰라도 ‘전쟁은 이제 싫다. 평화를 바란다. 군대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국민은 일왕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5개월 후, 46년 1월 설날 아침. 학교에서 아이들은 휘호를 썼다. 초등생 2학년이던 필자는 ‘태평의 봄’이라고 썼다.
6학년의 황태자, 지금의 일왕은 ‘평화국가 건설’이라고 했다. 이것이 모두의 바람이었다. 그리고 46년 ‘소년 구락부’ 1월호의 권두에는 미야자와 겐지의 시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고’가 게재됐다.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르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부질없으니 그만두라 이르고…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대지진 후 동북지방 출신 시인의 이 시가 일본 안팎에서 읽혀지는 건 우연이 아니다.
3월11일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 1000년 만에 밀려온 거대한 쓰나미, 그리고 인류 사상 최악의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3·11은 새로운 8·15이다.
과거 일본 국민은 1945년 8월15일 패전과 항복을 경험했다. 단순히 태평양전쟁에 패배한 것이 아니다. 1894년 청나라와 1904년 러시아에 선전포고한 이래 계속돼온 50년간의 동북아시아 전쟁, 동아시아 전쟁에 패배한 것이다.
일본인 사망자는 300만명, 일본의 희생양이 된 아시아인은 2000만명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국토는 초토화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원자폭탄 투하로 괴멸됐다. 쓰나미로 처참히 파괴된 동북지역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원폭 투하 후의 히로시마와 같다.
일본인 사망자는 300만명, 일본의 희생양이 된 아시아인은 2000만명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국토는 초토화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원자폭탄 투하로 괴멸됐다. 쓰나미로 처참히 파괴된 동북지역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원폭 투하 후의 히로시마와 같다.
[와다 하루키 칼럼] 일본어 원문보기
1945년 8월15일 방송에서 일왕은 “만세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고 말했다. 9월4일 제국의회 개회식에선 “평화국가를 확립해 인류의 문화에 기여하길 바란다”는 내용의 칙어를 내렸다.
어떤 의도로 한 발언인지는 몰라도 ‘전쟁은 이제 싫다. 평화를 바란다. 군대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국민은 일왕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5개월 후, 46년 1월 설날 아침. 학교에서 아이들은 휘호를 썼다. 초등생 2학년이던 필자는 ‘태평의 봄’이라고 썼다.
6학년의 황태자, 지금의 일왕은 ‘평화국가 건설’이라고 했다. 이것이 모두의 바람이었다. 그리고 46년 ‘소년 구락부’ 1월호의 권두에는 미야자와 겐지의 시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고’가 게재됐다.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르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부질없으니 그만두라 이르고…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대지진 후 동북지방 출신 시인의 이 시가 일본 안팎에서 읽혀지는 건 우연이 아니다.
패전 후 일본은 7년, 오키나와는 무려 27년간이나 미군에 점령됐다. ‘천황제’ 국가는 비군사화되고 민주화됐다. 국민은 전쟁과 무력 행사, 위협을 국제분쟁 해결의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일본국 헌법을 얻었다. 전후 일본의 모든 것은 8·15부터 출발하고 있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군인은 없어졌지만 관료와 일왕은 남은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권을 독점한 보수당이 헌법 개정과 자위군 창설을 목표로 삼았지만 비무장과 중립을 촉구한 야당이 헌법 수호로 맞섰다. 또한 8·15로 일본 관할에서 제외된 북방4도와 독도(일본명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며 반환을 요구하는 주장이 국론으로 유지됐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군인은 없어졌지만 관료와 일왕은 남은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권을 독점한 보수당이 헌법 개정과 자위군 창설을 목표로 삼았지만 비무장과 중립을 촉구한 야당이 헌법 수호로 맞섰다. 또한 8·15로 일본 관할에서 제외된 북방4도와 독도(일본명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며 반환을 요구하는 주장이 국론으로 유지됐다.
일본에선 2월11일을 건국기념일로 지정해 국가적 축일이 됐으나 거의 무시되고 있다. 되레 국가적 축일이 아닌 8월15일은 가장 중요한 국민적 의식의 날이 됐다. 8·15가 전쟁을 그만둔 일본인의 사고방식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전후 일본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8·15도 되돌아봤다. 8·15는 일본인에게 패전, 종전의 날이지만 한국인에겐 식민지 지배가 끝난 날이다. 일본인은 이 사실을 몰랐다.
식민지배를 반성하고 한·일 간 새로운 관계를 열려는 노력이 없었던 게 전후 일본의 본질적인 결함이다. 이런 인식은 65년의 한일조약 조인 후 생겨났다. 한일조약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반성이 담기지 않았을뿐더러 8·15 후 결함을 바로잡는 일도 없었다.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한반도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야 할 때가 됐다는 인식은 73년 시작된 한국 민주화운동과의 연대운동에서 생겨났다.
74년 필자는 65년 한일조약 때도 찬스를 놓친 일본인에게 한·일 연대운동으로 제3의 찬스가 왔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이런 노력은 80년대에 들어와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사죄의 국회결의를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89년의 쇼와 일왕의 죽음은 조선 식민지 지배의 반성·사죄를 촉구해온 지식인들이 국회결의를 촉구하게끔 했다.
89년 1월31일 우리의 결의를 담은 성명을 냈다. ‘세카이’ 4월호에 서경식씨가 ‘제4의 호기-쇼와의 종결과 조선’이라는 글을 발표했고 제3의 찬스를 만들려는 노력은 계속됐다.
식민지배를 반성하고 한·일 간 새로운 관계를 열려는 노력이 없었던 게 전후 일본의 본질적인 결함이다. 이런 인식은 65년의 한일조약 조인 후 생겨났다. 한일조약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반성이 담기지 않았을뿐더러 8·15 후 결함을 바로잡는 일도 없었다.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한반도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야 할 때가 됐다는 인식은 73년 시작된 한국 민주화운동과의 연대운동에서 생겨났다.
74년 필자는 65년 한일조약 때도 찬스를 놓친 일본인에게 한·일 연대운동으로 제3의 찬스가 왔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이런 노력은 80년대에 들어와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사죄의 국회결의를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89년의 쇼와 일왕의 죽음은 조선 식민지 지배의 반성·사죄를 촉구해온 지식인들이 국회결의를 촉구하게끔 했다.
89년 1월31일 우리의 결의를 담은 성명을 냈다. ‘세카이’ 4월호에 서경식씨가 ‘제4의 호기-쇼와의 종결과 조선’이라는 글을 발표했고 제3의 찬스를 만들려는 노력은 계속됐다.
80년대 말에는 북·일관계의 정상화를 촉구하는 지식인·정치가 모임이 식민지 지배의 반성·사죄로 북한의 문을 두드리자는 우리의 아이디어를 채용하게 됐다. 90년 가네마루와 다나베가 방북했고, 가네마루 자민당 부총재는 평양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을 표명했으며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에 대한 김일성 주석의 결단을 이끌어냈다.
89년부터 시작한 조선 식민지 지배 반성·사죄의 국회결의를 촉구한 운동은 95년 전후 격렬한 공방을 일으켜 6월9일 중의원 결의를 이끌어내고 결국 8월15일 무라야마 총리 담화로 귀결됐다.
89년부터 시작한 조선 식민지 지배 반성·사죄의 국회결의를 촉구한 운동은 95년 전후 격렬한 공방을 일으켜 6월9일 중의원 결의를 이끌어내고 결국 8월15일 무라야마 총리 담화로 귀결됐다.
우리가 촉구한 것은 식민지 지배가 군사력을 바탕으로 조선 민족에게 강제했다는 인식, 식민지 지배가 끼친 고통에 대한 반성과 사죄, 여기에 기초한 내외정책의 시정 결의 표명이었다. 무라야마 담화가 찬스를 살리려는 우리의 성과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반성·사죄에는 피해자에 대한 보상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상 요구가 90년부터 고조됐으나 일본 정부가 취한 것은 아시아여성기금 설치였다. 이에 강한 반발과 비판이 일었다. 일본 국내에선 우익적 운동이 거세졌다. 그래도 일본 정부는 아시아여성기금의 사업을 관철해 4개국 363명의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보상 사업을 실시했다. 그러나 강제동원 노동자에 대해선 유골을 반환하는 것 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0년 8월10일 한국병합 100년을 맞아 나온 간 총리 담화는 병합의 강제성을 인정하는 인식을 보이며 조선왕실의궤 등의 양도를 약속했다. 그러나 8·15의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장기간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정권에서도 북한과의 식민지 지배 청산, 국교정상화는 없었다.
한국병합 100년이 지나고 새로운 해에 3·11이 터졌다. 일본인은 다시금 파국의 바닥에서 부흥과 신생을 꾀하고 있다.
8·15가 스스로 일으킨 전쟁을 그만두고 앞으로 평화 속에 산다고 한 때였다면, 지금은 자연의 힘에 무너져 우둔함으로 스스로 악재를 배로 키운 사람이 그 고통의 밑바닥에서 일어나 자연과의 새로운 공생을 촉구할 때다. 8·15는 과거의 역사가 됐다. 일본 역사 속에서 ‘전후’는 끝난 것이다.
8·15가 스스로 일으킨 전쟁을 그만두고 앞으로 평화 속에 산다고 한 때였다면, 지금은 자연의 힘에 무너져 우둔함으로 스스로 악재를 배로 키운 사람이 그 고통의 밑바닥에서 일어나 자연과의 새로운 공생을 촉구할 때다. 8·15는 과거의 역사가 됐다. 일본 역사 속에서 ‘전후’는 끝난 것이다.
3·11을 새 출발점으로 해 일본의 장래를 구상해보자. 지진과 쓰나미의 열도 일본으로선 탈원전, 절전과 자연 에너지에 의한 발전을 중심으로 한 에너지 시스템, 이에 적합한 새로운 산업사회·자본주의의 형태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이웃국가와의 협조와 토론을 통해 새로운 경제와 사회를 도모하는 지역주의가 추구돼야 한다. 이른바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동아시아 공동체가 그것이다.
이웃과 정상적인 교제를 원한다면 분규는 신속히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3·11 이후 일본의 외교방침이어야 한다. 이웃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국교를 맺지 않은 이상한 현상을 바로잡아야 한다. 더욱이 세 개의 이웃국가, 러시아·한국·중국과 다툼을 벌이고 있는 영토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과거 65년간 해결하지 못하고 몇 년을 기다려도 충족되지 않을 요구를 반복할 여유가 없다. 당장 합의할 수 있는 선을 발견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러자면 현재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측의 권리를 인정하고 서로 양보하고 공동 수익의 선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북방4도에 대해선 2개 섬의 양도 약속을 전제로 나머지 2개 섬의 러시아 영유를 받아들이고, 독도의 경우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8·15에서 생긴 문제의 신속한 해결을 꾀하는 일이기도 하다.
과거 65년간 해결하지 못하고 몇 년을 기다려도 충족되지 않을 요구를 반복할 여유가 없다. 당장 합의할 수 있는 선을 발견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러자면 현재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측의 권리를 인정하고 서로 양보하고 공동 수익의 선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북방4도에 대해선 2개 섬의 양도 약속을 전제로 나머지 2개 섬의 러시아 영유를 받아들이고, 독도의 경우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8·15에서 생긴 문제의 신속한 해결을 꾀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8·15 이후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역사인식의 문제, 피해자 보상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8·15가 과거가 됐다는 것은 제반문제를 이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니라 새로운 협력을 위해 일방적으로 요구해선 안된다는 얘기다.
필자는 3월 한국 언론에 “죄 있는 자는 죄를 뉘우치고 원한이 있는 자는 원한을 뛰어넘어 화해하고 협력해 새로운 공동의 집을 지향하며 지구, 자연과의 공생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3·11 이후의 세계에서 보다 잘 살기 위해서는 과감하고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 8·15에 기인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그럼으로써 이웃국가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협력체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8·15 이후 65년에 대한 진지하고 건설적인 재검증이 전제돼야 한다.
필자는 3월 한국 언론에 “죄 있는 자는 죄를 뉘우치고 원한이 있는 자는 원한을 뛰어넘어 화해하고 협력해 새로운 공동의 집을 지향하며 지구, 자연과의 공생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3·11 이후의 세계에서 보다 잘 살기 위해서는 과감하고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 8·15에 기인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그럼으로써 이웃국가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협력체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8·15 이후 65년에 대한 진지하고 건설적인 재검증이 전제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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