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선 논설위원
이방인 관찰자는 보고 싶은 것만 보기 십상이다. 비틀스는 1966년 ‘노르웨이의 숲’이란 곡을 선보였다.
밤새 사랑을 나눈 여인이 다음날 깨어나 보니 사라지고 홀로 남은 쓸쓸함을 노르웨이 겨울 숲에 빗대 남의 얘기하듯 담담하게 읊조린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89년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60~70년대 일본 전공투(全共鬪) 세대의 상실감을 노르웨이의 숲으로 상징했다. 그래서 ‘작지만 강한 나라’(强小國)란 활력과 ‘복지국가의 교과서’라는 안정감이 늘 휑뎅그렁한 숲과 뒤섞여 연상되는 나라가 노르웨이다.
현지인의 눈에 비친 노르웨이는 다른 모습이다. 안드레스 베링 브레이비크(32)는 노르웨이에서 농산물 재배업체 ‘브레이비크 지오팜’을 운영했다. 그는 페이스북에선 2차대전 때 노르웨이 반나치 영웅 막스 마누스를 좋아한다고 했고, 트위터에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이익만 좇는 10만명의 힘에 맞먹는다”는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말도 올렸다.
보수 기독교인이자 민족주의자라는 그는 다문화주의에 강력하게 반대한다고 밝혔다. 그가 한때 몸담았던 민족주의 우파정당 ‘진보당’은 노르웨이 제2의 정당이다.
브레이비크는 지난 23일 노르웨이를 충격에 빠뜨린 연쇄테러 용의자가 됐다. 노르웨이 경찰은 집권 노동당의 청소년여름캠프 총기테러와 정부청사 폭탄테러에 대해 브레이비크가 “잔혹했지만 필요했던 것”이란 말로 범행을 시인했다고 밝혔다.
최소한 85명이 숨진 우퇴위아섬 청소년캠프 테러에서 살아 남은 한 참가자는 “우리는 그냥 보통청년들이다. 우리는 정치에 관여하며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다. 이런 청년들에게 용의자 브레이비크는 총질을 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말하고 있다.
노래와 소설 속의 노르웨이 숲과 브레이비크의 노르웨이는 이방인에겐 쉽사리 연결되지 않는다. 해마다 노벨평화상의 시상식이 성대하게 열리는 나라, 촘촘한 사회안전망을 자랑하는 복지국가에서 발생한 극악무도한 반평화의 테러가 지구촌을 경악하게 하고 있다. 단지 뭔가 노르웨이의 숲에는 출구를 찾지 못한 증오가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었던 것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종교적·인종적 광신이란 독버섯은 언제 어디서나 테러리즘의 외피를 두르고 열린 사회의 공적이 될 수 있다는 자명종이 노르웨이에서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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