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에 강한 향신료가 들어가면 그 요리의 진정한 맛을 찾기 어렵다. 각각의 풍미를 지닌 식재료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깊은 맛을 음미하지 못하고 향신료의 독한 기운만 미각에 남는다. 제대로 된 식재료를 사용하지 못한 부실한 요리에 일부러 향신료를 듬뿍 뿌려 맛을 감추는 경우도 있다.
지난 1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발표한 신년사에는 매우 향이 강한 향신료가 들어있다. 올해 신년사는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가 조금 구체적이라는 점을 빼고는 과거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과 북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여러 현안에 대한 커다란 입장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 단서도 딱히 발견하기 어렵다. 하지만 신년사에 들어 있는 딱 한줄, “분위기와 환경이 마련되는 데 따라 최고위급 회담도 못할 이유가 없다”는 구절은 다른 모든 내용을 압도하면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오고 있다. 어떤 식재료가 들어간 요리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강한 향신료처럼 ‘최고위급 회담’이라는 단어는 북한 신년사에 포함된 다양한 의미를 냉정하게 판단하기 어렵게 하는 효과를 낸다.
북한의 신년사가 나온 뒤 지난 2년간의 남북관계 경색 국면은 ‘해빙’으로 돌변하는 분위기다. 남북관계에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는 것은 분명 좋은 징조다. 하지만 신년 벽두부터 몰아닥치고 있는 남북 유화 분위기가 다소 뜬금없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갑작스러운 변화의 배경이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사실 정치적으로 남북정상회담보다 극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이벤트는 찾기 어렵다. 이념과 정치적 성향을 떠나 남북정상회담을 마다할 정부는 없다. 역대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의욕을 보인 것도 모든 정치 지도자들을 홀릴 수 있는 마력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1994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북·미의 군사적 충돌 직전 전격 방북해 북·미 대화 재개를 이끌어낸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에서 자신이 제외됐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북한에서 돌아온 카터 전 대통령으로부터 김일성 주석의 남북정상회담 제안을 전해 듣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첫 남북정상회담의 주인공으로 역사에 남았다. 노무현 정부는 임기를 불과 넉달 남긴 상황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강행하고 다음 보수정권이 백지화할 것이 뻔한 합의문을 발표하는 무리수를 뒀다. 임기 내내 북한과 대결적 자세를 취했던 이명박 정부도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미련만큼은 버리지 못했다.
출범 2년 동안 이렇다 할 남북관계의 전기를 잡지 못한 박근혜 정부에도 남북정상회담은 매우 매력적일 것이다. 특히 국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조기 레임덕을 걱정해야 하는 박근혜 정부의 입장에서 남북정상회담만큼 국면 전환에 좋은 카드는 없다.
작년 29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브리핑룸에서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내년 1월중 남북간 당국자 대화를 열어 상호 관심사에 대해 논의할것을 북측에 공식 제의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남북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박근혜 정부의 단심(丹心)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부디 아무런 사심 없이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진전에 커다란 전기가 마련되기를 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정부의 태도 변화는 마음에 걸린다.
남북 접촉 수석대표의 ‘격’을 엄격히 따지는가 하면 “대화의 내용만큼 형식도 중요하다”고 했던 정부가 이번에는 북한의 신년사가 나오자마자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대화가 개최되길 기대한다”며 말을 바꿨다. 북한이 크게 달라진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닌데 ‘최고위급 회담’이라는 한마디에 정부가 지난 2년간 보여줬던 것과 전혀 다른 태도로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남북정상회담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남과 북 모두 진정으로 관계개선을 원한다면 대뜸 정상회담을 거론할 것이 아니라 먼저 열린 마음으로 차분하게 대화를 시작하는 진지한 자세가 필요하다. 낮은 단계부터 대화를 진전시켜 나가면서 남북관계를 가로막고 있는 수많은 장애물들을 하나씩 치우고, 그 과정에서 쌓인 신뢰의 결과물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것이 정상이다. 그렇지 않은 남북정상회담은 정치적 거품만 요란하게 내뿜고 남북관계 개선에는 도움이 안될 수도 있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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