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종전의 시작’을 선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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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정동칼럼]‘종전의 시작’을 선언하자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7. 27.

국제정치에서 국가 간 협상을 다루는 분석틀 중에 양면게임(two-level game)이라는 것이 있다. 국제정치학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조금 어려운 내용이 될지 모르겠으나 최대한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흔히 국가 간 협상을 국가를 대표하는 협상 실무진 간의 협상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실무진 간에 주고받기를 잘하여 서로 합의를 이루면 협상이 타결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 국가 간 협상은 이렇게 단선적으로 협상 실무진 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두 국가의 협상 실무진끼리 아무리 합리적인 타결을 보아도 그 타결된 안을 각기 국내의 이해 당사자에게 가져가 설득하지 못하면 그 안은 죽어버리고 만다. 특히 협상된 내용이 국회의 비준을 받아야 하거나, 국내 여론의 대폭적인 지지를 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국내의 설득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국제와 국내의 양면에서 동시에 접점을 찾아야 협상이 타결된다는 의미에서 국제정치학에서는 국가 간 협상을 양면게임이라고 부른다.

이제 북·미 간의 비핵화 협상으로 눈을 돌려보자.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25일(현지시간) 미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 출석, 발언하고 있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날 미국의 목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 말까지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이루는 것이라고 밝혔다고 외신이 전했다. AP연합뉴스

 

비핵화 협상은 기본적으로 미국과 북한 양국 간에 이루어지는 협상이다. 그리고 양국이 아직까지 전쟁상태에 있기 때문에 북한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최대 전쟁능력인 핵을 포기하는 협상은 북한의 입장에서는 비핵화 협상이 아니라 패전에 해당하는 무장해제라고 볼 것이다.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까지 핵을 개발해 온 북한의 군부와 인민들이 미국 앞에서 무장해제와 패전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미국 및 남한과 대결적 전쟁상태가 지속된다면 김정은 위원장이 아무리 핵포기의 전략적 결단을 했다하더라도 이를 북한 국내에서 실행에 옮길 명분과 설득논리를 가질 수 없게 된다. 전쟁상태가 종식되고 미국, 그리고 남한과의 정상적인 국가관계가 성립된다는 확실한 신뢰가 있어야 북한이 핵심전력인 핵을 포기할 명분이 생긴다. 전쟁용으로 개발한 핵을 평화적 환경이 도래했으므로 포기하고 국가의 모든 자원을 경제건설에 투입하겠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비전이 국내적으로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래서 북한은 의미 있는 비핵화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미국과 한국이 우선적으로 ‘종전선언’을 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반면 미국의 입장에서도 국내적으로 이미 악마화되어 있는 북한에 선뜻 ‘종전’이라는 선물을 주기가 어려울 것이다. 종전을 선언했는데 북한이 비핵화를 질질 끌면서 제재의 완화만을 노린다면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북한에 농락당하는 꼴이 된다. 거기다가 종전과 함께 정전협정이 사라지면 유엔사령부의 존재 및 주한미군의 존재에 대해 북한이 문제 삼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한·미동맹의 문제까지 엮이게 되어 완전한 비핵화 이전에 남한과 미국의 매우 급격한 변동과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는 안보적 우려 역시 존재한다. 북한의 술수에 말려들 수 있다는 생각에 종전선언에 대한 미국과 남한의 국내적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가운데),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대사가 20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의 유엔 주재 대한민국 대표부에서 회동을 하기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뉴욕 _ AFP연합뉴스

 

하지만 양면게임의 성격상, 그리고 전쟁용이라는 북핵의 성격상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선언하는 종전선언은 본격적인 비핵화의 과정으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첫 관문이다. 북한도 북한 억류 미국인의 석방,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그리고 서해위성발사장 해체 및 ICBM 조립시설 해체라는 초기조치 등을 보여주면서 미국에 종전선언을 압박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해법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종전선언을 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종전의 시작’을 선언하는 것이다. 즉 종전도 과정으로 설정하고, 이제 종전이라는 과정의 시작을 알린다는 선언을 하는 것이다. 종전이라는 과정이 시작되면 전쟁용 무기인 핵을 해체하는 과정도 시작되고, 관계를 정상화하는 과정도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미국과 북한이 서로 만족할 만한 수준의 조치들을 취해감에 따라 신뢰가 쌓이고, 궁극적으로는 종전 과정의 끝을 선언하면서 바로 평화체제 수립의 단계로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종전이 시작되었으므로 김정은 위원장은 핵폐기의 명분이 생기고, 종전이 완벽하게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 국내의 우려도 상당히 불식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종전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과, 종전 과정의 끝을 알리는 선언, 그리고 평화체제 및 관계정상화를 향한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로드맵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대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외교가 종전선언을 놓고 미국의 선처만을 호소할 수는 없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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