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열 | 연세대 교수·국제정치
유로존 사태가 소강국면이다. 위기를 넘기 위해 유럽중앙은행(ECB)과 주요국 정상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여러 처방전을 쏟아냈으나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유동성의 공급규모도 턱없이 부족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손도 못대고 있다. 통화통합에 의해서 독일, 프랑스 등의 자본이 남유럽으로 흘러들어가 자산가격의 거품이 발생하고 붕괴하면서 야기된 오늘의 위기는 재정, 금융 통합의 정도를 높이고 역내 격차를 해소하는 구조적 해법을 요한다. 독일 등 선진국들은 함께 대수술을 집도하고 기나긴 재활의 과정을 주도해야 한다.
유럽경제의 침체가 장기화될 것이 분명한 한편 미국경제의 전망도 밝지 않다. 2011년부터 완연한 회복세이던 미국경제는 다시 하락하고 있다. 유럽의 침체로 수출이 타격을 받고 있는 가운데 실업률은 8%를 넘고, 경기자극을 위한 정책수단이 소진된 상태다. 또한 유럽과 연계되어 있는 금융시장의 위험도도 높다. 유럽과 미국의 정체 속에서 기댈 곳은 동아시아다.
(경향신문DB)
한국은 안으로는 ‘뉴 노멀(new normal)’로서 제로성장의 시대를 대비해야 하듯이 밖으로는 동아시아와 새롭게 연계해가는 전략이 필요하다. 동아시아가 지구촌의 성장엔진이기 때문은 아니다. 일본은 제로성장기이고 중국도 GDP 성장률이 크게 둔화되어 상당한 내부 진통을 예고하고 있다. 지도부 교체에 따른 정치적 조정비용도 적지 않을 것이다. 동아시아와의 연계는 성장이 아니라 공생을 위한 것이다. 글로벌 위기에 대해 집합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내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서로를 활용하며 함께 살아가는 시스템을 건축하는 일이다.
과거 노무현 정부는 동북아시대 구상을 국정과제로 내걸면서 야심찬 지역전략을 추진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동북아란 협소한 지역공간을 설정하다보니 넓은 동아시아공간을 모색한 이웃 중국, 일본과 엇박자를 낸 데다, 세계사의 중심에 서겠다는 자기중심성, 성장지향성이 넘쳐서 연대의 가치가 왜소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 정부는 글로벌 코리아를 내걸면서 한·미동맹의 복원에 역점을 두고 지구 전체로 전략적 지평을 넓히고자 G20 정상회의나 핵안보정상회의 등을 개최하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반면 지역공간 구상은 취약했다. 한때 신아시아구상을 내놓았지만 졸속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전략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미·중 간 지역아키텍처를 둘러싼 각축이 점증하는 속에서 지식의 빈곤을 느끼고 있다.
동아시아를 어떻게 엮을 것인가. 미국발 위기와 유럽발 위기를 연이어 맞으면서 동아시아는 언제 또 유동성 위기를 겪을 지 좌불안석이다. 효과적인 지역 안전망이 필요하다. 역내 국가간 양자통화스와프협정을 다자화하는 데까지 진전을 보았지만 여전히 유동성 공급 규모는 부족하고 IMF 링크(IMF로부터 금융지원이 실시되기 위한 조건)가 건재하여 독자적인 지역안전망이 되기는 요원하다. 한국은 외부 위기요인을 기회로 활용하여 중국과 일본간 의견대립을 조정하고 지역협력의 습관을 만들어가도록 지혜를 짜야 한다.
FTA도 새로운 발상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무기로, 수출 대기업의 이익만을 실현하는 정책이란 비난에 시달려온 FTA는 중소기업과 상생의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현재 동아시아 국가간 역내 무역비중이 높은 이유는 지역을 단위로 한 생산네트워크가 촘촘히 짜여가면서 네트워크 내 무역이 증가한 데 있다. 네트워크 무역의 주요 사례로서 중간재 수출은 동아시아 국가 전체 수출의 무려 50%를 차지하고, 그중 30%가 역내무역이다. 여기서 중간재 수출이란 중소기업의 활로를 개척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역내 생산네트워크의 확산을 돕는 방향으로 FTA를 설계한다면, 중소기업들이 해외생산네트워크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무수한 위험요소들이 도사리고 있는 동아시아의 향후 10년은 각생(各生)을 위한 힘의 각축이란 마인드를 넘어서 금융, 무역 등 여러 영역에서 공생을 위한 복합네트워크를 구축할 시간이다. 한국의 역할공간은 활짝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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