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미국이 주둔비보다 먼저 생각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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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정동칼럼]미국이 주둔비보다 먼저 생각할 것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11. 4.

미국이 예년보다 5배나 많은 주한미군 주둔비용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이 요구하는 수준으로 타결된다면 올해는 미군 군사력 수출의 원년이 될지 모르겠다. 지금도 주한미군 주둔 분담금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50억달러 요구는 상식적인 범주를 넘는다. 얼마만큼의 주한미군 주둔비용이 적절한지는 한·미 간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 정말 중요하고 필요하다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적더라도 지나칠 수 없다. 주한미군의 주둔비가 적절한지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주한미군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남침 위협 때문에 주둔해왔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핵 위협과 재래식 군사력 위협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북한의 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비용은 엄밀하게 말해 우리의 몫이 아니다. 우리가 핵을 보유하지 않는 것은 세계 평화를 위해 핵무기 확산을 방지하는 데 동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상대방이 핵으로 위협할 때 핵으로 대응하는 것은 자위권적 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핵을 보유하지 않는 것은 미국이 핵우산으로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믿기 때문이다. 


미국이 우리를 위해 북한의 핵을 억제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우리가 핵을 보유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원천무효이다. 당연히 북한의 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비용은 주한미군 주둔비에 포함될 성질이 아니다. 유사시 전락자산의 한반도 전개도 우리가 핵을 보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대가로 미국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라 할 것이다.


북한의 재래식 군사적 위협은 과거에 비해 그 성격이 달라졌다. 북한이 6·25전쟁 같은 전면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다. 우리의 지속적인 군사력 건설로 남북 간 재래식 군사력이 이미 역전되었다. 지금은 오히려 북한이 우리의 강력한 군사력을 걱정하고 있다. 북한이 9·19 남북군사합의에 서명한 것도 갈수록 격차가 벌어지는 재래식 군사력의 열세를 최소화해보겠다는 의도가 작용한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앞으로 남북 간 군사력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북한의 재래식 군사적 위협만 고려한다면 주한미군 의미는 과거와 다르다.


우리 스스로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북아지역의 안정자라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최근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폭격기 및 정찰기가 한반도 주변을 넘나든 것은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훼손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미국과 세력경쟁 차원에서 동맹국인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비상식적인 주한미군 주둔비를 요구하기에 앞서, 우리 국민들이 미·중 패권경쟁의 와중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한국과 한국민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의 패권경쟁으로 인해 한반도 주변의 안보관계는 점차 악화되고 있다. 한국이 이를 감수하는 것은 강력한 한·미동맹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안보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민들은 미국의 한반도 방위공약을 믿고 중국과 러시아의 압력을 견뎌내고 있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한국의 방위보다 미 본토 보호를 위한 것임은 모두 다 알고 있다. 미국의 방위를 위해 사드를 배치하면서 한국은 중국의 심각한 압력과 함께 피해를 당하고 있다. 미국은 사드 배치 이후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당하고 있는 군사적 위협과 경제적 피해를 못 본 척하면 안된다. 그런 한국에 아파트 방세보다 주둔비용을 쉽게 걷었다고 조롱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 피해를 당하고 있는 동맹국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6조원 정도의 방위비를 매년 지불하게 되면 한국은 복지와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예산운용에 상당한 지장을 받게 될 것이다. 미국의 도가 지나친 주둔비용 요구에 한·미동맹 관계를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는 젊은 장교들의 볼멘소리를 모른 척해서도 안된다. 우리 군이 매년 6조원 정도의 방위비를 지속적으로 증액하면, 불과 몇년 후 우리 스스로 주변국의 군사적 위협에 상당부분 대응 가능한 능력을 확보할 수 있다. 주변국을 군사적으로 패배시킬 수는 없어도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힐 능력을 갖추는 것은 가능하다. 미국이 한국에 일방적인 손해만 요구하면, 한국도 선택할 수 있는 길이 그리 많지 않다.


지금 미국은 동맹국에 일방적인 경제적 부담을 강요하던 델로스동맹의 아테네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동맹을 무시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던 아테네가 어떤 처지에 직면했는지 보여주는 역사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한설 예비역 육군준장·순천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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