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한·중·일이 전쟁과 평화를 말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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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정동칼럼]한·중·일이 전쟁과 평화를 말하는 법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8. 7.

하얼빈에서 히로시마 원폭 기념일을 생각한다. 한국인들에게는 청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곳으로 주로 기억되는 하얼빈에는 ‘731부대 죄증 진열관’이 있다. 일본군이 만주 침략 전쟁 중에 세균전을 벌이며 자행한 생체실험 등의 반인도적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그 전쟁범죄의 증거를 진열하는 기념시설이다. 엄청난 규모의 전시관은 2015년에 개축된 것인데, 일본의 만행과 침략을 기억하는 중국인들의 태도는 눈여겨볼 만한 것이다.


그것은 ‘죄증 진열’이라는 말에 집약된다. 민간인까지 대규모로 희생시킨 비인간적 전쟁범죄를 단 한 점의 감춤도 없이 드러내고, 전 세계에 널리 보여주고자 한다는 것이다. 무료로 운영되는 진열관은 성능 좋은 영어, 한국어, 러시아어 통역기도 제공한다.


왜 ‘죄의 증거’를 전시해야 할까? 일본은 20세기 초반 내내 나치 못지않은 대규모 학살과 갖은 비인도적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난징학살이나 위안부 문제처럼 이들을 부인하거나 미국의 비호를 받으며 전범 처벌과 역사청산에 게을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억시설에 흐르는 ‘반일’ ‘반전범’의 정조와 인식은 한국과는 사뭇 다르다. 중국인들은 일본의 죄상을 고발하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다. ‘반일 애국주의’는 중국의 지배이념이자 상식이다. 


한국은 어떤가? 일본의 전쟁범죄는 어떻게 기억되고 고발되었는가? 강제동원과 민간인 학살 등 조선인들이 받은 피해 사실 중에서 법정에 고발되고 처벌받은 사례가 있는가? 없다. 그 반대다. 한국이 전후 세계질서에서나 국제법적으로 전쟁 당사자나 피해자가 아니라 외려 전범국가의 식민지·부역자로 치부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에서 반일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한국 사회의 일각은 반일, 애국,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주저한다. 이승만·박정희의 폭압에 동원된 반일 민족주의의 부정적 역사에 대한 기억, 노동자 국제주의·세계시민주의·개인주의 등도 작용한다. 존중되어 마땅한 경우들이다. 그러나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정부와 행동에 나선 대중을 공격하는 데 여념이 없는 친일·극우 언론과 종교세력, 자유한국당·뉴라이트 등은 단죄되어야 한다.


한국 민족주의 또한 자기동일성의 논리지만, 강력한 제국주의의 시선과 내면화된 식민주의의 간섭 속에 전개돼온 것이다. 자존을 다치고 피해의 트라우마를 지닌 약자는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강자의 입장을 내면화한다. 평화란 궁극의 가치지만, 막연하고 맥락 없는 평화가 아닌 주체적이고 실질적인 ‘인간 안보’가 추구해야 할 바다. 약자가 두려워 숨죽이며 침묵하여 겉으론 아무 일도 없는 상태, 가해자가 가해조차 망각하거나 쉬운 면죄 때문에 거리낌이 없어 잠잠한 상태는 평화가 아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6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열린 원폭 희생자 위령식에 참석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히로시마 _ AFP연합뉴스


히로시마의 대비극을 생각해본다. 히로시마에 있는 원폭 피해 기념 시설은 온통 ‘평화’의 키워드로 치장되어 있다. 실로 끔찍한 대규모 민간인 피해를 아주 상세히 보여주면서도, 가해와 피해의, 그리고 그 원인과 경과의 구체적 사정은 제거돼 있다. 일본의 평화가 어떻게 누구에 의해 깨져 원폭 같은 절멸의 사건으로 귀착했는지? 미친 전쟁을 일으킨 ‘천황제’ 파시즘과 군부, 그리고 거기에 조력한 지식인·정치인의 책임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물론 민간인 거주지역에 원폭을 떨어뜨려 수십만의 생명을 학살한 트루먼과 미군의 책임도 없다. 이는 결국 전도된 피해자 코스프레나 일본 전후체제의 모순이며, 일본의 ‘병’은 이런 데 있는 거라는 지적은 이미 많았다. 


이 초유의 역사적 사태를 어떻게 슬기롭게 헤쳐갈까? 촛불집회를 주도하는 ‘아베 규탄 시민행동’은 ‘동아시아 평화 수호와 아베 타도를 위한 한·일 민중연대’로 개편되어야 한다. 그리고 더 많은 시민이 반아베 평화운동에 동참하려면, 단지 ‘애국심’이 아니라 이 공동체의 ‘좋음’에 대한 신념과 민주적 참여가 필요하다. 차제에 문재인 대통령은 정치·사회 개혁의 과제에 박차를 가하고 친일·기득권 구조를 혁파하라. 이야말로 극일의 결정적 내적 조건이다. 반대로 대중의 애국심을 정치에 이용해먹으려는 일부 여당 인사의 획책과 양극화 극복에 역행하는 경제정책의 추진은 또 다른 ‘내부 총질’에 다름 아니며, 평화와 민주주의를 향한 대오를 흐트러뜨리는 일이다.


우리도 더 많은 평화의 소녀상과 함께 그간 연구자들이 쌓아온 성과를 바탕으로 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의 ‘죄증’ 전시시설을 새로 만들어 일본인과 세계인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을까? 소녀상은 고 김복동 선생이 ‘내 삶이 증거’라 하셨듯, ‘피해자의 평화’가 아닌 전쟁범죄 증거의 상징이며 인류 양심의 상이다. 일본 우익이 아이치 트리엔날레에서의 소녀상 전시를 철회케 한 일 또한 스스로 죄를 증명한 일이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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