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 국제질서에서 한국의 역할
본문 바로가기
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코로나 이후 국제질서에서 한국의 역할

by 경향글로벌칼럼 2020. 4. 8.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에서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과 전화 통화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인류 문명사의 전환점에는 항상 바이러스가 있었다. 페스트는 13~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5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급격한 인구 감소에 따른 노동력 부족으로 봉건제가 무너지고 시민사회가 출현하는 단초가 됐다. 16세기 유럽의 정복자들과 함께 남미에 상륙한 천연두는 당시 내성이 형성되지 않았던 원주민 90%를 절멸시킴으로써 남미 문명의 몰락을 가져왔다. 남미 정복으로 얻은 막대한 금과 은이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자본주의의 기초가 형성됐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패권이 미국으로 넘어가게 된 이면에는 1918~1920년 전 세계에서 5000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이 있었다.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도 세계 질서를 바꾸게 될 것이다. 지금 전 세계를 짓누르고 있는 불안과 공포 속에는 단지 감염에 대한 우려뿐 아니라 코로나19 이후 어떤 변화가 올지 알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포함돼 있다. 어떤 세상이 오게 될 것인지는 사실 선택의 문제다. <사피엔스>의 저자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 예루살렘히브리대 교수는 지난달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에서 인류가 ‘분열’과 ‘국제연대’라는 길을 두고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지적했다. 그는 “각국이 각자도생의 분열을 선택한다면 더 큰 재앙이 닥칠 것이며 국제연대를 선택한다면 승리로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감염병 유행 인류 모두의 문제 

미·중 이전투구에 리더 안 보여 

한국 코로나 대응, 세계가 주목 

개방적이고 투명한 모델 ‘울림’

‘독자적 외교정책’ 반전의 기회



만일 국제사회가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국제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생태·기후변화 문제에 대해 각성하며, 다자주의 정신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코로나19는 세계적 교훈을 남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런 방향으로 향하지 않는 것 같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일(현지시간) 백악관 브리핑룸에서 열린 코로나19 대응 태스크포스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매우 참혹한 시기에 다가가고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 _ UPI연합뉴스


코로나 사태 발생은 시기적으로 매우 좋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이 ‘미국(만)을 위대하게’라는 구호로 세계를 분열시키며 ‘고립주의의 세계적 유행’을 선도하고 있고, 미·중 무역갈등으로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졌으며, 유럽연합(EU)은 영국의 탈퇴로 하나가 되기로 한 결정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의구심을 갖기 시작할 때 코로나 위기가 시작됐다. 과거 유행했던 다른 감염병 사태 때와 달리 이번 코로나19 발생 초기부터 인종주의적 편견과 혐오가 강하게 나타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팬데믹 선언은 단순히 감염병 대유행 현상만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제 이 감염병은 ‘모두의 문제’이며 다른 나라가 안전하지 못하면 나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인식을 갖고 연대·공조하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하지만 각국은 팬데믹 선언 이후 더욱 장벽을 높였다. G20 정상들은 코로나19 피해와 국제무역 붕괴를 막기 위해 국제적 연대가 필요하다고 공감했지만 아직도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수출통제, 입국제한은 강화됐고 백신·치료제 개발을 위한 국제적 협력과 빈곤국에 대한 지원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리더 역할을 해야 할 나라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다. 중국은 초기 발병 상황을 은폐·축소해 세계가 이번 사태를 초기 진압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다. 미국은 사태를 오판해 안이하게 대처하다가 재앙을 맞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처음부터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내 신뢰를 잃었다. 가장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할 미·중은 상대를 서로 비난하며 아직도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코로나 이후 전 세계는 새로운 물결과 만나게 될 것이다. 미·중 갈등이 더욱 깊어지고 국제무역이 마비된 상태여서 독특한 안보환경과 높은 대외무역 의존도를 가진 한국에는 더욱 험난한 앞길이 예상된다.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한국이 인권침해적 봉쇄나 비밀주의 대신 개방성과 투명성을 유지하는 정책을 채택해 성과를 거뒀다는 것이다. 다소 운이 따라주기는 했지만, 한국이 다른 나라를 따라하지 않고 독자적인 전략을 성공시킴으로써 선진국들이 한국의 경우를 참고하기 시작한 것은 전례가 없었던 일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한국이 제시한 ‘개방적이고 투명한 자유주의 모델’은 글로벌 리더가 없는 현재의 세계에 커다란 울림을 가질 수 있다. 만약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한국이 ‘외교정책의 정체성’을 선명히 하고 한국의 현실에 부합하는 정책을 독자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면 코로나19는 한국에 반전의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