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유엔 제네바 군축회의 순회 의장국이 된 것에 대해 미국 정치인들과 언론은 연일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핵무기를 개발하고 무기를 수출하는 북한이 의장국이 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일리애나 로스-레티넨 미 하원 외교위원장은 “북한이 군축회의 의장국이 된 것은 여우에게 닭장을 지키도록 맡긴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난했다. 캐나다는 북한이 의장을 맡는 4주 동안 회의를 보이콧하기로 했다. 로스-레티넨은 캐나다의 조치를 환영했고, 일부 미국 언론들은 미 행정부도 이에 동참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해 핵무기를 개발하고 각국에 무기를 수출하는 북한의 행동은 분명 유엔 군축회의의 취지와 의무에 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65개 회원국이 알파벳 순서로 의장국을 맡는 유엔 규정과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진정으로 핵무기 없는 세상을 원한다면, 규정이나 절차를 문제삼기에 앞서 군축회의가 왜 10년 가까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군축회의는 무기용핵분열물질생산금지조약(FMCT)에 관한 논란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핵보유국들은 각국의 핵물질 생산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이미 생산된 자국의 핵물질을 감축 대상에 포함시키라는 요구는 무시한다.
특히 미국은 국익을 위해 NPT 가입국도 아닌 인도와 핵협정을 맺음으로써 파키스탄을 포함한 각국의 반발을 초래하고 군축회의를 뇌사상태에 빠뜨렸다.
그동안 국제사회가 제안한 각종 핵군축 관련 결의안에 가장 반대한 나라도 바로 미국을 포함한 핵보유국들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지난 1월 군축회의 연설에서 이 회의체가 심각한 ‘신뢰성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경고한 적이 있다.
북한이 아니라 다른 어떤 나라가 의장국을 맡는다 해도 뇌사상태의 군축회의가 깨어날 가능성은 없다. 닭이 한 마리도 없는 닭장을 여우가 지키든 개가 지키든 달라질 것은 없다. 닭장이 비워진 책임을 먼저 논하는 게 순서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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