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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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이 남긴 것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4. 27.

다자외교 협상에서 모든 나라가 만족하는 합의문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 때문에 의장국은 통상 모두가 불만을 가질 만한 합의문 초안을 제시한다. 특정국이 반색할 내용을 담은 초안은 다른 나라가 반대하기 때문에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모든 나라가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초안이어야 비로소 논의의 기초가 된다. 다자외교 합의문이 대부분 흐리멍덩하게 나오게 되는 이유다.

4년6개월의 협상 끝에 지난 23일 한·미가 가서명한 새로운 한·미 원자력협정은 다자외교 합의문과 비슷하다. 뚜렷한 방향성이 없는 대신 원자력협정에 대해 제각각의 목소리를 내던 국내 산업계·원자력계·정치권·언론의 주장을 모두 담을 수 있도록 틀을 넓혔다.

사실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은 순서가 잘못됐다. 협상에 앞서 국내 원자력 정책의 방향이 먼저 정해졌어야 했다. 하지만 정부 협상팀은 한국의 원자력 정책이 향후 어떤 방향으로 갈지 모르는 상태에서 협상을 시작해야 했다.

협상 초기부터 원자력계는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재활용)를 위한 파이로프로세싱(건식재처리) 도입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시민단체와 일부 전문가들은 이를 ‘원자력 마피아의 밥그릇 지키기’라고 비난했다. 때마침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지면서 국내에서도 원전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반면 현실적으로 원전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반론도 높아졌다. 포화상태의 사용후 핵연료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도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언론과 정치권은 ‘핵주권’을 들먹이며 농축·재처리 권리를 주장했다.

결국 정부 협상팀은 향후 어떤 원자력 정책이 추진되더라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넓은 틀의 협정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개정 협정은 농축·재처리를 하지 않는 것으로 돼 있다. 그러면서도 재처리의 일종인 파이로프로세싱의 전단계는 자유롭게 시행할 수 있도록 하고 미래의 농축 가능성도 열어 놓았다. 농축·재처리를 하겠다는 것인지 안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또 사용후 핵연료를 중간저장하거나 영구처분할 경우에 각각 대비하고 해외 위탁 재처리 가능성도 살려놓았다. 내용이 모호하고 너무 포괄적이어서 협정문만 봐서는 한국의 원자력 정책 방향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 때문인지 이의제기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22일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한미원자력협정에 가서명을 하고 브리핑을 하고 있다. 한미원자력협정은 4년 6개월여간의 협상 끝에 22일 타결됐다. (출처 : 경향DB)


지나간 협상 과정을 돌이켜 보면 그동안 원자력협정을 둘러싸고 국내에서 벌어졌던 논쟁이 얼마나 소모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이번 협상 결과는 농축·재처리 권리 확보를 주장하는 국내적 요구가 극에 달했던 2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포장을 점잖게 하긴 했지만 한국이 농축·재처리를 하지 못하는(또는 안 하는) 본질적 구조에는 변함이 없다.

개정협정으로 한국이 수행할 수 있게 된 파이로프로세싱의 전단계(전해·환원 공정)는 재처리를 위한 사전 단계일 뿐 재처리는 아니다. 또 정부는 미래에 농축을 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 길이 갈 수 없는 길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결국 농축·재처리는 미국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2년 전 농축·재처리를 확보하지 못하면 마치 나라가 망할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던 언론과 정치권은 이번 협상 결과에는 별 말이 없다. 이럴 거면 2년 전에는 왜 반대했는지 알 수가 없다.

환영 일색의 원자력계 반응도 의아스럽다. 전해·환원 과정은 파이로프로세싱을 하지 않을 것이라면 의미가 없는 공정이다. 또 미국은 앞으로도 한국에 파이로프로세싱을 허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국은 끝이 막혀 있는 길을 가는 셈이다. 그럼에도 원자력계가 이를 환영하는 걸 보면 연구·개발(R&D)의 방향이 맞든 틀리든 막대한 연구비만 보장받을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한국 원자력 산업의 시급한 문제들은 대부분 국내적 결정 사안이어서 한·미 원자력협정으로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사용후 핵연료 포화’ 문제는 저장 시설을 확보하고 사용후 핵연료 처리 방식을 정책으로 확정해야 풀린다. 또 원전 의존도를 계속 높일 것인지, 장기적으로 줄여나가는 방안을 추진할 것인지 정해야 한다.

또한 만천하에 드러난 원자력계의 비리와 부정을 바로잡아야 하고 원자력 관련 지식과 정보를 독점한 채 자신들의 이권 확보에만 골몰하는 ‘원자력 마피아’와 ‘전문가 카르텔’을 해체해야 한다. 한·미 원자력협정은 타결됐지만 한국 원자력이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유신모 외교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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