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NA’의 퇴장과 대안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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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TINA’의 퇴장과 대안 찾기

by 경향글로벌칼럼 2013. 4. 22.

몇 년 전 서울에서 열린 한 국제학술대회의 기조연설 도중 미국의 인류학자 헨리 셀비는 오늘날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여성을 소개했다. 그 이름은 TINA였다. 풀어본즉 There is no alternative. TINA는 얼마 전 작고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의 또 다른 별명이었다. 1997년 구제금융 사태 이래 한국 사회에서도 ‘대안이 없다’는 주장이 득세했다. 그동안 강자의 논리가 판치고 사회 변화를 위한 의지와 상상력은 크게 위축됐다.


라틴아메리카의 주요 국가들은 한국에 앞서 유사한 상황을 겪었다. 1982년 8월 멕시코가 외채 지불유예(사실상 국가 파산)를 선언한 뒤 그 파장은 라틴아메리카 곳곳으로 퍼졌다. 국제통화기금의 긴급지원을 받은 국가들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체질을 바꾸라는 처방에 따라 정부의 규제를 축소하고 교육·보건·사회간접자본 등의 공공지출을 재조정하며 비효율적인 공기업들을 민간부문에 매각하고 외국자본에 대한 제한을 철폐하거나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국내 시장을 개방해야 했다. 이는 ‘질서와 진보’를 내세워 유럽형 국가를 수립하려 한 19세기 말 칠레와 아르헨티나 지배층의 전략이나 1980년대 영리 추구의 걸림돌을 제거한 대처의 ‘대대적인 우향우 공연’과 판박이였다. 그리하여 1960~1970년대에 군부독재와 경제적 종속에 대한 저항의 거점으로 부각된 라틴아메리카는 1980년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실험장이 됐고 대외종속의 탈피와 내부지향적 발전을 모색해온 라틴아메리카 나름의 미래 구상은 폐기됐다. 니카라과의 집권 산디니스타조차 1988년 초 인플레이션에 시달린 경제를 안정시키고자 얼마간 시장 중심의 구조조정을 수용할 정도였다.


대처 전 영국총리 얼굴 조각. 연합뉴스


시대적 대세로 떠오른 신자유주의적 처방은 공공부채의 누적과 고율의 인플레이션이라는 라틴아메리카의 지병에 효과가 있어 보였으나 점차 결함을 드러냈다. 2001년 말 재발한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는 1994년 말 멕시코의 페소화 위기와 마찬가지로 긴축재정, 대규모 정리해고, 전면적 시장개방, 경상수지 악화, 실질소득 감소 등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정책의 소산이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성장곡선이 곤두박질친 1997년 이래 빈곤의 절대적 수치와 비율은 모두 증가했다. 대개 농촌에 집중된 빈곤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도시로 확산됐고 그 정도는 심해졌다. ‘보이지 않는 손’을 예찬한 신자유주의는 경쟁력 없는 대중에게 보이지 않는 주먹을 휘둘렀다. 한국 사회도 뼈저리게 경험했듯이 이 주먹은 수많은 가정을 박살내고 어렵게 다져온 공동체의 모양새를 급격히 무너뜨렸다.


2008년 금융자본주의의 위기와 미국의 경제정책 전환 이전에 라틴아메리카인들은 신자유주의적 처방이 지역 상황에 맞게 개조되어야 한다는 점, 달리 말해 하나의 치수가 모두에게 꼭 맞지 않는다는 상식을 실감하면서 그것을 재정비하고 사회정책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대안부재론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이다. 1990년 이후 칠레의 민선정부는 전면적 신자유주의 개혁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형평을 고려하는 부분적 개혁, 말하자면 ‘인간의 얼굴을 지닌 구조조정’을 선보였다. 이는 이미 1945년에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나 세계 혁명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의 파멸을 언급하면서 전 세계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지역적 경제 계획을 강조한 경제사상가 칼 폴라니의 전망과도 맥이 닿는 대목이다.


시장만능주의를 신봉해온 한국의 보수 세력이 지난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재벌개혁, 동반성장, 경제민주화, 복지정책 등 낯선 의제들에 주목한 것은 놀랍기까지 했지만 그저 대중을 현혹하는 정치적 술책에 그친 듯하다. 수많은 이들의 고통과 불평등을 가중시킨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과정을 면밀히 재검토하고 그들의 삶을 보호할 장치를 마련하며 시민의식의 고양과 사회적 연대를 도모해야 한다. 때늦었지만 TINA도 퇴장한 마당에 덜 부조리한 대안 찾기는 난제일지라도 꼭 필요한 일이다.



박구병 | 아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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