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 18세기 혁명을 통해 민주정치를 가장 먼저 실현했던 프랑스와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선진국’ 미국은 국민에게 가장 기초적인 의료보험조차 제공하지 못하는 나라다. 올해 시행된 오바마케어는 이런 수치스러운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이었지만, 국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리당략에만 집착하는 공화당의 반대로 이번에도 보편적 의료라는 기본권은 실현되지 못했다.
유럽재정위기를 맞아 국민에게 허리띠를 졸라매라던 프랑스의 예산장관 카위작은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를 통해 탈세를 일삼아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해 3월의 일이다. 그 후 장관이나 의원 등 공직자의 재산을 공개해야 한다는 여론이 부상했지만 ‘프라이버시’ 보호를 핑계로 흐지부지되었다. 좌우가 손을 맞잡고 거대한 장막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국민의 기본권을 외면하고 집권을 위한 정쟁만 일삼는 정당, 자신들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는 당파를 초월하여 담합하는 정치인들, 너무나도 익숙한 광경이다. 정치인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순간부터 집착하는 것은 다음 선거에서의 재선이다. 두 번, 세 번 당선되면서 기득권은 견고해지고 종신 의원을 꿈꾼다. 워싱턴DC와 파리, 그리고 서울, 예외 없는 중병의 징후들이다.
고인 물은 썩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부터 직업 정치인의 부패를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으로 여겼다. 아테네의 의회 불레(boule)는 일반 시민을 제비뽑기로 선발하여 1년간 정치 활동에 종사하도록 했다. 그리고 매년 의원을 전원 교체했다. 로마 공화국에서는 다양한 공직자를 선출해 1년 근무하게 한 뒤 10년간 재임을 금지할 정도였다. 개인의 이익을 최소화하고 공익을 극대화하려는 제도다.
오바마 케어 지지하는 아기엄마들 (출처: 경향DB)
민주주의의 근대사에서도 직업 정치인은 항상 견제의 대상이었다. 1776년 펜실베이니아 헌법은 3년 임기 의원의 재선을 금지했다. 아직도 미국의 많은 주는 임기에 제한을 둔다. 36개 주는 주지사 임기를 8년으로 제한한다.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미시간 등 15개 주는 주 상·하원에 대해서도 8~12년 정도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문제는 중이 제 머리를 깎지 못한다는 점이다. 독일의 정치학자 미첼스는 1911년 ‘정당론’에서 정치인이 원래 정당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는 데 더 열중하는 목표대치현상을 ‘과두제의 철칙’이라고 불렀다. 미국, 프랑스, 한국 등 민주주의의 선·후발을 막론하고 공통적인 현상이다.
프랑스에는 다양한 선출직을 겸임할 수 있는 악습이 존재한다. 그래서 하원의원 87%, 그리고 상원의원의 74%가 지방 선출직을 겸임하고 있다. 국회의원이면서 동시에 시장, 도의원, 지방의원 등을 겸임하는 것이다. 영향력과 소득을 독점하는 ‘정치안전망’을 굳건하게 만들어 놓은 셈이다. 미국에서도 주지사 단임제는 오랜 기간 다양한 주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2000년을 전후해 재임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로 바뀌었다. 현재 주지사 단임제는 버지니아만의 특징이 되어 버렸다. 1992년 활동을 시작한 ‘미국임기제한’(USTM)이라는 시민단체는 의원과 주지사 등 선출직의 임기제한을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다. 선출직을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자리가 아니라 공익에 봉사하는 공복의 위치로 되돌려놓기 위한 노력이다.
병을 치유하는 첫 걸음은 두 가지다. 임기를 줄여 선거를 더 자주하거나 임기의 수를 제한하는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 단임제는 이런 점에서 매우 훌륭한 제도다. 국정운영의 안정과 민주적 순환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자치단체장과 의원의 단임제 또는 임기 제한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다. ‘새누리’와 ‘새정치’가 아무리 새로움을 강조해도 하지 못할 일이다. 국민과 여론과 시민운동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조홍식 | 숭실대 교수·사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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