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삼바와 마르티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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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국제칼럼]삼바와 마르티의 교훈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8. 22.

경기침체가 이어지고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이 진행되는 가운데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2016년 하계 올림픽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세부 경기 종목에 대한 관심이 더 뜨겁겠지만, 개최국이 개막식 공연에 어떤 내용을 담느냐는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올림픽 개막 공연에서 브라질이 집약적으로 선보인 독특한 상징 자산은 짐작한 바대로 삼바와 카니발이었다.


경쾌하고 신명나는 삼바 춤과 음악은 브라질 인구의 10%에 육박하는 아프리카계 흑인(혼혈인은 브라질 인구의 40% 이상)들의 역사와 문화적 뿌리를 대변한다. 특히 남쪽의 부유한 백인 거주지와 북쪽의 파벨라(빈민촌)나 유색인 거주지가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삼바는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종교 칸돔블레나 아프리카계 주민들의 과거사 경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또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카니발의 의미와 형식을 둘러싸고 세련된 기념행사를 지지하는 이들과 이에 반발하는 아프리카계 주민 사이에 충돌이 빚어졌지만, 카니발은 점차 아프리카계 흑인의 문화와 긴밀하게 결합되었다. 삼바가 브라질의 ‘국민 음악’으로 자리 잡게 된 1930년대 초에 이르러 카니발 역시 강렬하게 환희를 표현하는 축제 무대로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1964년 군부쿠데타가 발발하기 전 대중문화가 전례 없는 혁신과 활력을 선보였을 때, 페르난두 팜플로나같이 문제의식과 재능을 갖춘 기획자들은 1695년 포르투갈군의 진압 작전으로 살해당한 ‘팔마레스 공화국’의 흑인 지도자 줌비(Zumbi)의 일대기를 카니발 행진에 활용할 주된 테마 중 하나로 삼았다. 이로써 아프리카계 주민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 탈주 노예 지도자는 브라질의 공식 역사에 등장하는 유일한 흑인 영웅이 되었고 삼바 가사에 담겨 흑인들의 슬픔을 끝장낸 인물로 각인되기도 했다.


지난달 쿠바의 아바나를 방문했을 때, 필자는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30년대에 몇 년간 묵었다는 암보스 문도스 호텔 부근의 한쪽 벽에서 예기치 않게 쿠바 독립 투쟁의 영웅 호세 마르티가 남긴 흔적을 접할 수 있었다. 19세기의 후반부를 불꽃처럼 살다 간 마르티의 글귀는 구조조정을 유도하는 각종 사업의 압박 속에서 자괴감에 빠져드는 한국의 대학인에게, 더욱이 역사 전공자에게 기운을 북돋워주는 격려의 메시지처럼 들렸다. 


“대학은 쓸모없어 보이지만 헌신하는 순교자와 제자들을 배출합니다. 인류가 펼칠 미래 삶의 가능성을 배우려면 과거 삶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만들어 가는 것, 바로 그것이 역사입니다.”



3일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추진 철회 입장을 밝힌 최경희 이화여대 총장/ 서성일 기자



교육부의 졸속 지침에 따라 한국의 이름난 한 여자대학교가 신설하려고 한 평생교육단과대학의 명칭은 ‘미래라이프대학’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얼마 전 광복절 기념식에서 한국의 대통령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역사를 직시하는 가운데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연설했다. 하지만 마르티가 웅변하는 대로 미래의 삶은 과거의 삶과 무관한 방식으로 펼쳐지진 않을 것이다. 미래지향적 관계는 어두운 과거를 잊거나 거론하지 않고 미래가 그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될 수 있으리라는 비역사적 망상으로, 게다가 밀실 속의 졸속 결정으로 구축되기 어렵다. ‘미래라이프대학’을 고집하면서 경찰이 대학 캠퍼스로 들어온다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엄혹한 탄압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한 그 대학 총장에게, 그리고 애써 한쪽 눈을 감으려는 권력자에게 울림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마르티의 고언(苦言)을 들려주고 싶다. 과거와 미래의 연결고리를 제대로 짚어내는 일은 지도자에게 꼭 필요한 책무이며 진지한 과거사 성찰 없는 미래지향적 관계는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



박구병 | 아주대 교수·서양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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