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에 자유주의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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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동북아에 자유주의를 허하라

by 경향글로벌칼럼 2013. 12. 2.

동북아에 어두운 그림자가 점차 짙어지고 있다. 경제적 상호의존이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안보 갈등은 여전히 지속되는 ‘동아시아 패러독스’도 더욱 깊어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한·중·일을 순회방문한다고 하지만, 미국 역시 갈등의 한 축이라는 점에서 그 조정력도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마주 달리는 기차처럼 동북아에는 신뢰적자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미국을 등에 업은 아베 내각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민주주의의 토대를 무너뜨린다는 일본 내 강력한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중의원에서 특정비밀보호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것이 참의원에서 통과되면 내년에는 집단자위권을 허용하는 쪽으로 헌법 해석을 바꾸고자 할 것이고, 집단자위권 행사를 위한 세부 작업도 마무리할 것이다. 이러한 일본 우경화에 브레이크가 없고 일본 자유주의자들의 노력도 힘에 부치는 형국이다.

 

캐롤라인 케네디 주일 미국대사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예방하고 있다. (경향DB)

중국도 강국화의 시동을 걸었다. 이제 ‘앞에 나서지 않고 내실을 기하겠다(韜光養晦)’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18기 3중전회에서 국가안전위원회를 설치함에 따라 공세적 외교가 만성화하는 것 아니냐는 주변국가의 우려도 나오고 있다. 최근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대한 중국식 대응이자, 지켜야 할 핵심이익의 범주가 넓어지는 것임과 동시에 주변국을 크게 의식하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사이 금년 6월에 개최된 한·중 정상회담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안보논리가 사회를 압도하는 사이 신뢰외교는 찾아가는 적극적 외교에서 기다리는 소극적 외교로 변질됐다. 사안이 불거질 때마다 강경하게 맞불을 놓고, 예민한 정치적 카드도 외교적 고려 없이 국방부문이 먼저 꺼내들고 있다. 주변국의 안보공세에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겠지만, 동북아 안보딜레마에 더 깊이 연루되면서 외교적 입지를 좁히고 있다.

이러한 동북아 안보현실 속에서 자유주의의 공간은 형편없이 축소됐다. 동북아 평화와 연대, 동아시아 공동체, 대화의 습관화 등은 수면 아래에서 좀처럼 동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 공론장이 기능하지 못하는 사이, 국민설득보다는 국민동원의 논리가 팽배해 있고, 어려울 때일수록 신뢰구축을 강화하자는 제안도 ‘배제의 논리’에 힘을 잃고 있다. 중·일관계가 악화되면서 중국 내에 일본정부와 일본국민을 분리해 대응하자는 주장은 설 땅을 잃었고 고군분투하던 자유주의자들도 현실에 굴복하면서 전향했다. 일본 우경화에 비판적인 일본의 지식인들도 ‘국익’의 기세에 눌려 발언권이 크게 축소됐다. 게이오대학의 모리 가즈코(毛里和子) 선생 등 중국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신형중·일관계를 모색하는 연구자’ 모임을 조직하고자 하는 노력이 눈물겨울 정도이다. 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예민한 사안이 불거질 때마다 언론은 경쟁적으로 일본과 중국 ‘때리기’에 나서고, ‘친일’, ‘친중’의 낙인을 찍는 이념공세 속에서 중국, 일본 연구자들도 침묵모드로 돌아섰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공간이 축소되고 힘의 논리에 기초한 ‘강 대 강’의 국면이 구조로 정착된다면 한국 외교의 운신의 폭도 크게 제약당할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외교와 안보논리를 분리해야 한다. 무슨 말이냐고 펄펄 뛸지 모르겠지만, 외교와 안보가 묶여 있는 한 안보논리가 외교의 영역을 지배할 수밖에 없다. 우리 외교도 안보논리에 밑줄을 긋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구나 외교의 대상이 상대국이 아니라 국내정치의 포로가 되어버린 것도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또 하나는 사안별로 분리, 대응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교과서, 군위안부, 강제징용 피해자, 집단자위권 문제 등이 성격이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묶어 접근하고 있다. 중국의 국가안전위원회 설치와 방공식별구역 표시도 ‘중국위협론’으로 쉽게 간주해 버린다. 물론 일본도 한국이 이미 ‘작은 중국’ ‘친중화’되었다고 믿고 있고 중국도 한국의 많은 외교정책을 ‘한·미동맹’의 틀로 해석해 버리는 경향이 늘고 있다. 이러한 전략적 불신들이 여과 없이 불신의 프레임으로 고착되고 있다. 주가(朱家) 가훈에 “목마른 뒤에 우물을 파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더 늦기 전에 우물을 파야 한다. 좀 더 높은 곳에서 새로운 레짐과 대담한 전략적 용기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정책결정과정에서 민주적 토론과 소통공간을 넓혀야 한다. 그래야 공론장도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희옥 | 성균관대 교수·성균중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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