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와 새주인 베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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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목수정의 파리 통신

르몽드와 새주인 베르제

by 경향글로벌칼럼 2010. 7. 2.

목수정 작가·프랑스 거주

팔려간 르몽드지의 새 주인 셋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끄는 사람은 피에르 베르제다. 1944년 창간 이래,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정론지로서의 모양새는 지켜왔으나, 초심을 저버린 지 오래인 르몽드의 쓸쓸한 운명을 애도해줄 아량까지는 없다.

 


5년 전 파리오페라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러 온 이브 생 로랑과 그의 연인 베르제를 보았고, 두 사람의 50년 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접했다. 1962년, 그는 연인 이브 생 로랑을 설득하여 이브생로랑사를 함께 설립하고, 그들의 신화를 만들어간다. 20대 초반부터 카뮈, 사르트르, 콕토, 앙드레 부르통 등 당대의 지성인, 예술가들과 교류하던 그는 일찌감치 예술과 좌파의 성향을 뚜렷이 가슴에 새겼다. 이브생로랑사의 직원들은 매년 프랑스공산당이 주최하는 휴머니티축제에 참가하기도 했다. 프랑수아 미테랑의 열렬한 지지자이던 베르제는 81년 미테랑 집권 이후 예술과 문학 분야에서 광범위한 재정지원을 펼쳐왔고, 88년부터 5년간 국립오페라 바스티유극장의 디렉터로 극장을 이끌기도 했다.

99년 동성애자들의 합법적인 연대를 공인하는 팍스법(PACS·시민연대계약법)이 통과하자, 오랜 연인인 이브 생 로랑과 팍스에 서명했다. 성소수자 연대의 활동가로서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며, 에이즈퇴치운동협회를 창립하여 대표를 역임하기도 한다. 1981년 사회당의 미테랑을 지지한 것처럼,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와 맞서 싸운 사회당 대통령후보, 세골렌 루아얄을 적극 후원했다. 불확실한 훗날을 위해 양쪽에 고루 떡값을 묻어두는 기업들의 행태와는 확연히 다르다.

2008년 이브 생 로랑이 죽은 후, 그는 두 사람이 함께 모으고 소장해온 예술품 700여점을 경매에 내놓았다. 둘이 함께 아끼고 감상하던 예술품들이 혼자 남은 그에겐 아무 의미도 되지 못한다는 설명과 함께. 당시 경매에 나온 작품 중 아편전쟁 당시 프랑스군에게 도난당한 두 개의 청동상에 대해 중국 정부는 반환을 요청했고, 베르제는 이렇게 답했다. “중국 정부에 이 청동상들을 당장 돌려줄 수 있다. 그들이 인권선언을 적용하고, 티베트인들에게 자유를 허락하며, 달라이 라마의 귀환을 허용한다면.” 제국주의를 반성할 줄 모르는 서구 자본가의 오만이란 비난과, 티베트와의 분쟁으로 비난을 사던 중국 정부에 일침을 가했다는 상반된 평이 뒤따랐다. 평생 그랬던 것처럼.

세계적 명품 브랜드의 창업자이며, 좌파 정치가들의 확고한 후원자, 사회운동가이며 또한 공연예술 경영자이기도 했던 그는 한 아름다운 남자와의 전설적인 사랑을 나눈 연인으로서 가장 눈부시게 빛난다. 명예와 부를 위해 자신의 삶을 절멸시키지 않고, 자신의 가슴을 타오르게 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명예와 부를 이용할 줄 알았기에. 얼마 전, 죽은 연인에게 바치는 저서 <이브에게 보내는 편지>를 출간한 그는, 사르코지의 손아귀에 들어갈 뻔한 르몽드를 구출하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이 속한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행동을 보탠다. 르몽드를 공공자산으로 여긴다는 선언, 편집권의 완전 독립, 경영진 결정에 대한 기자협회의 거부권 보장과 함께.

사회당을 돕고 르몽드를 구해내는 일이 세상을 변혁하는 일에 직접 기여하지 못한다 해도, 성공한 기업인이면서 동시에 사회운동가이고, 자신의 사랑에 충실한 한 남자의 굽힘없는 삶을 지켜보는 일은 신선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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