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정 작가·프랑스 거주
나의 5살된 딸아이는 유치원에 다닌다. 내용상으론 유치원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초등학교 입학 전에 다니는 3년 과정의 학교다. 학기말이 가까워지면서 담임선생님이 학업평가서를 집으로 보내오셨다. 최종 평가를 하기 전에 학부모가 먼저 동의하는지 살피는 과정이다. 11가지의 평가항목 가운데, 첫 항목은 ‘학생이 되기’였다. 공동생활의 규칙을 존중하는지, 관심을 한곳에 집중하는지, 선생님의 지시를 이해하는지 등 아이들이 공동생활의 첫걸음인 학교라는 사회에 잘 적응하는지를 살피는 항목이다. 그 외에 시간, 공간, 수량, 형태, 환경에 대한 개념, 언어구사 능력 여부, 마지막 두 항목이 ‘몸으로 표현하기’ ‘인식하고, 느끼고, 상상하고, 창조하기’였다. 각 항목은 점수로 평가되지는 않고, 아이가 그 항목을 체득했는지, 하는 중인지, 전혀 이르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표기되어있다.
이 나이의 아이들에게 평가의 잣대를 들이댄다는 행위 자체가 뒷목이 당기는 일이었지만, 그 첫 항목이 “학생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딸아이를 학생이 되라고 저곳에 밀어넣었던가 하는 자각에 온몸이 뻣뻣해졌다. 나와 아이 아빠가 같은 심정이어서, 선생님께 이런 생각을 슬쩍 전달했다. 선생님은 우리 의견에 공감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설마 이 항목을 제가 정했다고 생각하진 않으셨겠죠. 물론 교육부에서 내려온 것이고, 이전 정부에서는 첫 항목이 ‘함께 살아가기’였습니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 둘은 일순간 “하악”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학생이 되기’와 ‘함께 살아가기’ 이 두가지 목표는 얼핏 비슷한 행동양식을 요구하는 듯하나, 전혀 다른 세계관을 제시한다. ‘학생이 되기’에서 아이들은 온전히 의무만을 지닌다. 자연 속에서 새들처럼 펄펄 날아다니는 자유로운 삶의 주체이던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서면서 학교가 요구하는 지시를 따라야 하는 규율에 자신을 길들여야 한다. 학교는 지시하고 학생은 이에 따른다. 시선은 일방적이다. 학교라는 주체가 아이들이라는 객체를 학생이라는 잣대로 내려다보는 시선만이 가능한 구도다. ‘함께 살아가기’에서 시선은 사방으로 열려있다. 주체와 객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지시자와 수행자가 다르지 않다. 함께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서로를 존중하고 규칙을 지켜야 할 뿐, 정해진 질서에 순응하고 권위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훈련받지 않는다. 중도우파 자크 시라크에서, 극렬한 우파 니콜라 사르코지로 건너간 이 미세한 변동이 가져다주는 실천적인 삶 속에서의 파장은 이토록 거대하다.
신자유주의 10년,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처참하게 허물어져 간 것은 공교육 시스템이다. 학생 인권은 무덤 속으로 이미 들어간 지 오래. 학교는 강화된 자본주의 체계에 오로지 경쟁이란 전략으로 살아남을 것을 가르치며, 사교육의 위력에 차분히 고개 숙이는 부끄러운 지대로 전락했다. 유치원 때부터 경쟁을 시키겠다던 공정택 전 서울시교육감이 제 꾀에 넘어가 사라지고, 새로 그 자리에 앉을 곽노현 교육감 당선자를 비롯해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새 교육감들에게 모든 이의 관심이 집중된다. 우리가 지난 시간 교육분야에서 절망해왔던 만큼, 진보 색깔의 교육수장들에게 거는 사회 전체의 희망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다. 우리의 아이들이 혼자 앞서가는 능력보다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학교에서 배울 수 있다면, 이 사회는 함께 그 지혜를 나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칼럼===== > 목수정의 파리 통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통령은 정말 잘 뽑고 볼 일이다 (0) | 2010.07.16 |
---|---|
르몽드와 새주인 베르제 (0) | 2010.07.02 |
진화하는 선거방식이 선거혁명 낳는다 (0) | 2010.06.04 |
학교를 좋아하니? (0) | 2010.05.14 |
‘대지의 여신’을 위로할 시간이 필요하다 (0) | 2010.04.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