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언론 ‘양치기 소년’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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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특파원 칼럼

미 언론 ‘양치기 소년’ 딜레마

by 경향글로벌칼럼 2021. 6. 16.

코로나19의 불길이 서서히 잡히고 있다. 국가 간 백신 접종 격차, 변이 바이러스 등 위험 요인은 여전하지만 적어도 긴 터널의 끝이 보일 것이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대조적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기원을 둘러싼 논란은 재점화되고 있다. ‘연구소 유출설’이 재부상하면서다.

 

중국 후베이성 우한바이러스연구소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출됐을 수 있다는 의혹은 지난해 봄부터 일부 언론과 과학자들에 의해 제기됐지만 주류 언론과 과학자들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낭설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연구소 유출설을 강력하게 주장할수록 언론은 더욱 단호한 어조로 배격했다.

 

지난달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코로나19 공식 발병 전인 2019년 11월 우한연구소 직원 3명이 코로나19와 일치되는 증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미국 당국의 보고서가 있다는 언론 보도를 필두로 의심 정황을 뒷받침하는 보고서와 보도가 쏟아졌다. 급기야 조 바이든 대통령은 실험실 사고로 유출됐을 가능성에 대해 미국 정보기관들의 평가가 엇갈린다면서 90일간 추가 조사를 지시했다.

 

미국 주류 언론들은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음모론으로 못 박은 연구소 유출설의 공식 지위가 가설 중 하나로 격상했기 때문이다. 언론사들은 과거 기사의 온라인판에 ‘사실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는 주석을 달았고, 유명 언론인들은 해명을 하느라 진땀을 뺐다.

 

데이비드 레온하트 뉴욕타임스 기자는 대중국 강경파인 톰 코튼 공화당 상원의원이 이 의혹을 처음 제기했고,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강력 지지했기 때문에 많은 언론인들이 중국 때리기로 치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밝혔다. 당시 트럼프 전 대통령 등이 우한연구소 기원설을 주장하면서도 제대로 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낭설로 치부했던 판단은 옳았다면서 반박하는 부류도 있다.

 

미국 언론이 처한 상황은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거짓말쟁이 양치기 소년을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딜레마를 닮았다. 반복되는 거짓말에 질린 마을 사람들은 “진짜로 늑대가 나타났다”는 양치기의 외침을 외면했다. 마을 사람들이 거짓말쟁이 양치기의 참말을 외면한 결과 양들이 죄다 늑대에게 물려 죽었다. 양치기도 거짓말의 대가로 늑대에게 물려 죽었지만, 양들이 죽은 피해는 마을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야말로 거짓말의 대가였다. 과장은 애교였고,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1월 트럼프 전 대통령 임기 4년간 ‘허위 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분류된 발언은 3만573건이었다고 보도했다. 그는 지금도 지난해 미 대선이 부정선거였다고 주장한다.

 

조너선 칼 ABC방송 워싱턴 특파원은 방송에 나와 “많은 사람들이 창피를 당했다”면서 “어떤 것은 트럼프가 말했어도 진실일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언론은 지난 4년간 트럼프 전 대통령의 거짓말을 ‘팩트체크’ 하느라 전력을 다했지만 연구소 유출설에선 이 명제를 망각했다. 연구소 유출설이 진실인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언론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주장했다고 해서 음모론으로 치부하는 ‘집단사고’에 빠졌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됐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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