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라이의 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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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라이의 추태

by 경향글로벌칼럼 2013. 9. 4.

오관철 베이징 특파원


보시라이(薄熙來·64) 전 중국 충칭(重慶)시 당서기에 대한 재판 개시일이었던 지난 8월22일은 덩샤오핑(鄧小平)의 탄생 109주년 기념일이었다. 보시라이는 충칭에서 ‘공동 부유론’의 깃발을 들었던 인물이다. 덩샤오핑이 내세운 선부론(先富論·능력 있는 자가 먼저 부자가 되는 것)이 대륙에서 득세하면서 빚어진 불균형 성장과 빈부 격차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게 공동 부유론의 핵심이다. 이 때문에 보시라이는 25명 정치국원 중 한 명이 아니라 국가 지도자급에 버금가는 정치적 무게감을 갖고 있었다. 또 시장을 중시하면서도 우파보다 상대적으로 불평등 문제를 깊이 우려해 온 중국의 신좌파들에게 현실 정치인 보시라이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분배를 강조해 온 보시라이를 단죄하는 재판 개시일이 덩샤오핑의 탄생일이란 것은 이런 점에서 신좌파 세력에 대한 경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당연히 보시라이가 재판정에서 어떤 말을 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의 재판이 단순 부패 사건을 넘어 정치재판으로 규정됐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시라이가 보여준 태도는 한마디로 목불인견(目不忍見·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음) 수준이었다. 재판 초반에 검찰을 몰아세우면서 명불허전(名不虛傳·명성이 알려진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음)이란 평가를 듣는가 싶더니 시간이 갈수록 막장 불륜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변해 갔다. 부패 혐의를 부인하기 위해 부인과 부하를 집요하게 끌어들이는 모습을 보면 한때 중국의 총리 1순위로 거론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만약 보시라이가 다음과 같은 최후 진술을 남겼다면 어땠을까.


“저는 개혁·개방의 과실을 누리지 못하고 벼랑끝으로 내몰리는 인민들을 사랑했습니다. 덩샤오핑 동지가 개혁·개방이 100년 동안 흔들림없이 지속돼야 한다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중국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저만 억울하게 걸렸다고 변명하진 않겠습니다. 공동 부유론의 가치를 인정받는다면 저는 죽을 때까지 영어의 몸이 돼도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끝내 무죄를 강변하는 데 최후 진술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보시라이가 재판 전에 자신이 겪은 정치적 암투와 국가기밀을 누설하지 않으며 공산당과 국가 지도자 이름을 언급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는 설도 있긴 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보시라이는 감옥생활을 면하기 위해 자신의 정치 철학을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내팽개친 셈이 됐다.


보시라이 스캔들 핵심 4인 (출처 :경향DB)


최근 베이징에서 만난 신좌파 학자는 “보시라이만의 문제가 아니란 걸 잘 알지 않느냐”면서도 그의 치부에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 빈부격차 해소와 계층 간·지역 간 균형 발전이란 화두가 앞으로 뒷전으로 밀릴 가능성을 우려하는 기색이었다.


지난해 3월 낙마할 때까지 4년 동안 충칭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보시라이는 대표적 지한파(知韓派) 정치인으로 불렸다. 충칭은 1940년부터 광복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줄지어 충칭으로 달려가 그를 만나고 사진을 찍었다. 일부는 의전상 수모를 당하면서도 방중 성과를 내세우려 면담에 급급했다는 뒷말도 낳았다. 당연히 지나치게 특정인에게 쏠린다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중국 사람들은 관계의 중요성을 얘기하면서 ‘친구를 한 명 더 알면 길이 하나 더 생긴다’는 말을 한다. 그만큼 관계에서의 쏠림 현상은 위험할 수 있다. 


앞으로 누가 보시라이와의 친분을 중국 지도층에 내세울 수 있을까. 보시라이 1심 재판이 끝난 지 열흘이 지났지만 이런저런 교훈을 던지며 여운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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