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세계를 뒤흔든 트럼프의 미 대선 승리와 불확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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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사설]세계를 뒤흔든 트럼프의 미 대선 승리와 불확실성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11. 10.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예상을 깨고 승리했다. 미국민은 물론 전 세계는 지난 6월 영국의 예상치 못했던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 때를 넘어서는 충격을 받고 있다. 미 CNN 방송은 투표 전날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 당선 확률이 91%로 높아졌다고 보도하는 등 대부분 언론은 트럼프의 패배를 점쳤다. 주가의 흐름도 같은 방향이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트럼프는 손쉽게 승리했다. 미 정가 경력이 전혀 없는 ‘아웃사이더’가 미 대통령이 되는, 240년 미국사 최초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트럼프 승리에는 기존 지지층인 쇠락한 중서부 제조업 지대(러스트 벨트) 백인 노동자들이 결집한 데다 샤이 트럼프(숨어있던 트럼프 지지자들)가 대거 투표장으로 나갔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정치 공학적 분석만으로 트럼프 승리를 분석하기는 부족하다. 오히려 미 워싱턴 정가와 주류 언론, 월가 등으로 표징되는 기존 질서를 유권자들이 거부했다고 보는 게 마땅하다. 기득권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들이 패배한 것이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 경찰을 자처하며 개입주의 노선을 유지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개방주의라는 세계 질서를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부는 소수에 집중됐고, 불평등은 심화했다. 노동자들은 오르지 않는 임금 통장을 쥐고, 월가와 워싱턴 정가 요인들의 번쩍이는 삶을 질시해야 했다. 8년 전 버락 오바마 미 민주당 후보가 외쳤던 ‘변화’의 바람도 기득권을 흔들지 못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운데)가 9일 밤(현지시간) 승리 축하파티가 열린 뉴욕 맨해튼 힐튼미드타운호텔에서 러닝메이트 마이크 펜스의 손을 잡고 승리 연설을 하고 있다. 뉴욕 _ AP연합뉴스

 

그 불만을 어느 정치인보다 날것으로 이야기한 게 트럼프 후보다. 억만장자, 부동산 재벌인 트럼프 후보는 TV 연예 프로그램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치며 오직 미국만을 위한 미국을 내세웠다. 일자리 보호를 명분으로 멕시코 불법 이민자를 막을 장벽을 설치하겠다면서 멕시코 이민자를 강간범이라 불렀다. 여성을 ‘미스 돼지’ ‘미스 가정부’ ‘빔보(골빈 미녀)’라고, 무슬림은 ‘테러범’으로 비하했다. 소수자 옹호, 이민자 수용 등 관용과 정치적 올바름보다는 ‘내 일자리와 내 재산’ 보호 같은 욕망의 정치를 대리했다. 백인 저소득층, 보수층을 중심으로 열광적 지지를 받는 ‘트럼피즘’이 뒤를 따랐다.

 

트럼프 후보는 미 정당·정치 제도의 틀도 깼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만든 미 공화당에 혈혈단신 들어가 강자 16명을 패퇴시키더니, 결국 민주당 클린턴 후보까지 무릎 꿇렸다. 미 대선 과정을 정책과 공약의 경쟁이 아니라 추문 폭로와 이전투구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대선판은 쇼 비즈니스에 다름 아니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추악한 선거운동은 모두 그가 기획해낸 것이다. 그에 맞선 클린턴 후보는 기성정치의 대표자로 각인됨으로써 유권자의 염증을 풀어주지 못했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대표해온 진보와 변화를 자신의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였다. 지지율 50%가 넘는 현역 대통령 오바마의 지원도 기득권의 성에 갇힌 클린턴을 구출하지 못했다.

 

트럼프 후보는 미국 사회에 분열과 갈등의 씨앗을 뿌림으로써 미국 민주주의 모델을 위기로 몰았다. 그러나 변화에 대한 열망이 있을 때에는 그 변화를 반영하는 정치적 결과를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가 살아 있다는 점도 보여줬다. 결국 트럼프 후보는 유권자들의 기성 체제에 대한 미국 보통 시민들의 뿌리 깊은 혐오와 새로운 체제를 위한 변화 열망에 기대 고 전복과 부인, 부정을 무기로 미국 대권을 거머쥔 것이다. 지금까지 정치학 교과서는 상당 부분 새로 써야 할 판이다.

 

45대 미국 대통령 트럼프 앞에는 난제가 산적해 있다. 무엇보다 최악의 선거라는 혹평을 받은 이번 대선 기간 갈가리 찢긴 미국의 상처를 치유하고 통합을 이뤄내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미 공화당이 상·하원에서 모두 다수당이 됐다. 하지만 트럼프 후보가 지금까지 보여준 독불장군식의 태도라면 여야 모두와 갈등할 때 국정을 원만하게 이끌기는 어렵다. 또 기존에 내놓은 공약들을 구체화하고, 합리적 의견을 도출해 실행가능한 대안이 되도록 다듬는 것도 무거운 숙제다. 특히 자신의 당선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브렉시트보다 몇 배는 강력할 것이라는 우려를 잠재워야 하는 과제도 있다.

 

트럼프 후보는 오바마 대통령의 불법 이민자 추방을 유예하는 이민개혁 행정명령 폐지, ‘오바마케어’(국민건강보험 가입 의무화) 백지화, 소득세와 법인세 등 감세, 각종 자유무역협정 폐기나 재협상, 환경규제를 천명한 파리협정 탈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기여도 축소 등을 천명해왔다. 미국제일주의, 반세계화, 신고립주의, 보호무역 기조다. 트럼프는 기존 우방보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관계 진전 등 국제 정치에서의 격변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는 구체적 대안을 내놓지는 않았다. 기성 질서 거부라는 그의 분명한 입장과는 달리 그가 생각하는 다른 질서가 무엇인지, 그의 비전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트럼프 시대의 미국, 나아가 트럼프 시대의 세계는 불확실성에 휩싸여 있다. 미국인은 물론 세계인은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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