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 딸 아이가 텔레비전 앞에 붙어 있다. 화면 가득 여남은 살 소녀들의 굳은 얼굴이 차례로 지나간다. 오디오는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발언을 쏟아낸다. “못생긴 얼굴, 게으름뱅이 뚱보, 돼지 같은, 몸매가 안 되면 눈길도 안 가지.”거울 앞 소녀들은 우울의 늪에 가라앉듯 몸을 늘어뜨린다. 마지막 화면은 한 줄 자막으로 채워졌다. ‘이 사람이, 딸을 위해 당신이 바라던 그 대통령인가?’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대선 광고다. 2주 전 폭로된 트럼프의 성추행 발언은 ‘트럼프=역겹다’라는 자동반사적 반응을 만들었다. 돈 많은 늙은 남자의 징그러운 손이 온 미국 여성의 뇌리에 스멀거린다. 대선 레이스를 외면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진흙탕 속에서도 번득이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비상할 채비를 한다. 2차 대선 토론부터 전면에 나온 클린턴의 ‘3차 산업혁명’ 비전이다. 클린턴은 일자리 창출이라는 대의를 내세우며 에너지 정책이라고 포장했다. 기존 산업의 저항을 부르지 않으려는 의도다.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힐러리 클린턴이 23일(현지시간) 노스캐롤라이나주 롤리에 위치해 있는 세인트오거스틴대학에서 유세를 하고 있다. 롤리 _ AP연합뉴스
내용은 재생가능 에너지 인프라 구축이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전력 수급방식을 기존의 엘리트 에너지(화력, 수력, 원자력)에서 지역 단위 중심으로 바꾸는 정책이다. 집마다, 사무실마다, 주차장마다 햇빛과 바람과 지열을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도록 하겠다는 약속. 주, 시, 농촌에 600억달러를 지원한다. 2025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30% 줄이고, 2050년에는 80%까지 줄이겠다는 계획이다. 9월3일 파리 기후변화협약을 비준한 버락 오바마 정부와 중국 시진핑(習近平) 정부의 결의를 이행하겠다며 10월 초부터 전면에 내세웠다.
2차 토론에서 트럼프는 오바마 정부와 클린턴을 싸잡아 비난했다. 무능력한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제조업을 내쫓고 일자리를 파탄 내더니 이제 탄광 노동자까지 거리로 내몰려는 무도한 정책이라는 것이다. 대선 주자들이 입 맞추어 주장하는 지점이 ‘자유무역 반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그동안 반(反)세계화 활동가들이 농민, 노동자, 청년들과 외치던 구호다. 로널드 레이건 정부부터 오바마 정부까지 군산복합체와 금융자본의 지원 아래 언제나 옳은 정책이었던 자유무역이 보수와 진보 양 후보로부터 도마질을 당한다. 하지만 배경의 결은 다르다. 트럼프는 멕시코, 중국, 아시아 국가를 위한 협정이라며 반대한다. 클린턴은 버니 샌더스를 비롯한 풀뿌리 세력의 오랜 저항을 받아들이는 방편으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까지 반대하고, 기업 이윤 중심이 아닌 노동 계층의 생계 안정을 향해 선회했다.
트럼프는 기업 이윤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넘치도록 ‘톱다운(top down)’의 물꼬를 트겠다며 대규모 세금 감면을 외친다. 클린턴은 ‘미들업(middle up)’을 강조한다.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경쟁에 몰리며 무너진 중산층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표현이다. 일자리 창출은 대기업의 수익이 증대할 때가 아니라, 소규모 사업장이 확산될 때 일어났다는 통계를 들이밀며 1000만 일자리 창출을 약속한다.
중소기업 육성은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핵심이기도 하다. 클린턴이 제시한 방안은 창조경제와는 다르다. 에너지 정책이 핵심이다.
전력시스템을 재생에너지와 스마트 그리드로 전환할 때 주택을 비롯한 건물의 리모델링과 소규모 단위의 에너지 관리 시스템이 거대한 일자리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지난 15년 동안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이 만들어낸 변화의 증거가 이를 뒷받침한다.
3차 산업혁명은 19일 마지막 대선후보 토론에서도 거론됐다. 클린턴의 미등록 이주자 사면 정책에 대해 트럼프는 국경을 개방하겠다는 의도라며 공격했고, 사회자는 클린턴의 과거 강연을 인용했다. “나의 꿈은 국경을 열고 교역을 시작하는 지구적 시장공동체”라는 발언이다. 클린턴은 이는 에너지에 대한 꿈이며, 이웃 국가와 더 많은 에너지 교역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국경을 넘나드는 전력 공급 시스템은 모두에게 엄청난 이익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고. 스마트 그리드 인프라를 구축하는 유럽이 지향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에너지 정책 전환은 자본의 질서를 뒤흔드는 격동이다. 산업화 선두국가들이 시장 쟁탈을 위해 일으켰던 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간 지속돼온 힘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새로운 꿈틀거림이다. 달러가 득세하고, 이를 떠받드는 미국은 석유, 석탄, 천연가스 등 엘리트 에너지 확보를 위해 군사력을 동원한 대외정책을 펴왔다. 조지 W 부시가 일으킨 이라크 전쟁을 CNN, 뉴욕타임스 등은 ‘석유 전쟁’이라 불렀다.
반전 활동가들은 전쟁의 이윤을 챙기는 워 프로피터(war profiter)로 미국의 벡텔, 핼리버튼, 셰브론-텍사코, 록히드 마틴을 꼽는다. 벡텔은 세계 최대의 건설 기업으로 워싱턴 정가의 낙하산들이 진출하는 기업이다. 이 기업이 지난 세기 미국의 중동 정책의 틀을 짜고 바꿔왔다고 폭로하는 책이 지난 3월 출간됐다. 2013년 유가 급등세 속에서 캘리포니아와 오리건, 텍사스 일부가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전력 그리드를 바꿨으나 오바마 행정부는 셰일가스 개발로 가버렸다. 그만큼 자본의 질서가 견고하다는 예시일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완숙기에 접어들면서 중앙에서 지역으로 내려가는 수직질서는 분산적 수평질서로 바뀌고 있다. 여기에 재생가능한 에너지로 산업의 동력과 생활에너지를 바꾸는 것이 인터넷과 스마트 그리드를 결합한 3차 산업혁명이다. 재생가능 에너지로 수소전지 차량을 충전함으로써 차량의 탄소배출을 줄이고, 쓰고 남은 전기는 개인들이 사고팔 수 있는 시스템이다.
변방의 저항이 중앙 무대에 서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기후변화는 8년 전까지도 워싱턴 정가에서는 ‘세상에 없는 일’이었다. 부시는 기후변화를 인정하지 않았고, 기업들은 반대 연구에 돈을 쏟아부었다. 이라크 전쟁 역시 반대의 울부짖음은 중앙에 가닿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물방울들이 바위를 뚫듯 99%의 저항은 금융자본의 질주를 발목 잡으려 한다. 목숨을 내던지며 커밍아웃했던 성소수자들의 고백은 소수자 인권을 대통령 후보의 주요 공약으로 만들었다. 스며들듯 퍼져나간 합리적인 생각들이 공감의 기운을 깨우고 문화를 만들었다. 중앙의 정치가 겨우 힘에 밀려 목청을 열었다 해도 한번 스며든 생각은 그리 쉽사리 빠지지 않기에, 지구 전체의 생명력을 고려하는 오늘의 논쟁은 또 다른 변화의 힘을 키우는 동력이 될 것이다.
욕설에 온갖 성추문까지 쓰레기통에 처박힌 미국 대선이지만, 이들 수뇌부는 2050년을 그려내고 있다. 2017년을 기대하는 우리의 정치는 과연 어떤 목소리를 준비하고 있을까. 변방의 살아있는 행동을 껴안고 무대에 오를 때, 세상도 정치도 기회를 얻지 않을까. 속절없게도 선거란 대중의 뒤를 쫓는 비겁함을 본질로 한다. 결국 우리는 중앙의 정치를 저잣거리로 끌어내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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