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여름 허스트신문의 27살 젊은 기자는 독일 항복 이후 유럽을 취재하라는 데스크의 지시를 받았다. 그의 취재 노트. “파괴는 철저했다. 뒷골목에는 시체에서 나는 역겨운 악취가 심하게 진동하고 있다. … 여자들은 먹을 것만 얻을 수 있으면 무엇이든 하려 든다.” 포츠담에서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유럽 주둔 미군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조찬 회동을 현장에서 취재했다.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이다. 순차적으로 미국 대통령이 된 사람이 한 장소에서 만나는 극적 장면이다. 신문기자는 세상의 맨 얼굴을 찾아가는 최초의 목격자이자 권위있는 해석가이다. 그 매력 때문에 마르크스, 처칠, 헤밍웨이도 기자를 했다.
신문과 기자의 힘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이다. 1971년 뉴욕타임스의 펜타곤 페이퍼 보도 이후 닉슨의 압박으로 신문사가 생사기로에 직면했을 때 워싱턴포스트의 소유주인 캐서린 그레이엄은 딱 한마디를 했다. “계속 하세요(go ahead).” 1년 뒤 다시 닉슨과 대결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을 한 것이다. 닉슨의 보복이 예상됐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 <대통령의 사람들>에서는 편집국장이 두 기자와 함께 그레이엄의 최종 판단을 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역시 같은 말 한마디. 그리고 곧 윤전기가 그 사건을 머리기사로 한 신문을 토해낸다. 이후 워싱턴포스트는 언론의 전설로 남았다.
그런 신문이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아마존닷컴 창업자인 제프 베조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전쟁과 혁명, 세상사를 기록하며 세계를 만들어온 신문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 같다. 이 신문 인터넷판에는 마이애미헤럴드 일요판 전 편집장이 제프 베조스에게 쓴 편지가 실렸다.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워싱턴포스트 본사 정문 전광판에 5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가) 제프 베조스에게 팔렸다”는 뉴스 문구가 흐르고 있다. 워싱턴 _ AFP연합뉴스
‘1982년 신문의 사주가 내게 실버 나이트상 수상자들을 1면 톱에 실으라고 요구했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뛰어난 고교 3년생에게 주는 실버 나이트상은 사주가 설립했다. 나는 아첨하는 기사는 일요판과 맞지 않는다며 눈에 덜 띄는 면에 배치했다. 사주는 말 안 듣는다고 노려보기는 했지만 내게 거절할 수 있도록 허용할 만큼 현명했다. 그런 편집국의 분위기로 인해 10년 지나 우리는 여러 개의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면에 실으라던 그 학생은 팔레토고교를 1등 졸업한 베조스, 당신이었다.’
이대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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