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의도된 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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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여적]의도된 우연

by 경향글로벌칼럼 2013. 8. 12.

‘나는 하늘의 한 조각 구름/어쩌다 그대 흔들리는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우더라도/그대 놀랄 필요도/반가워할 이유도 없소/금방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니까….’ 중국 현대시의 개척자이자 ‘국민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쉬즈모(徐志摩·1896~1931)의 시 ‘우연’에다 국내에도 많은 팬을 가졌던 홍콩 출신 가수이자 배우인 천추샤(陳秋霞·56)가 곡을 붙인 같은 제목의 노래다. 1970년대에 나온 것이지만 인터넷을 보면 지금도 국내에 애송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추샤 (연합뉴스)


우연은 사람과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큰 변수이자 동력이 아닐까 싶다. 인생도 역사도 우연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우주의 씨앗인 특이점이 생긴 것도, 거기서 빅뱅과 함께 우주가 시작된 것도 우연한 사건이라고 할 정도다. 우리가 말하는 필연도 따지고 보면 수많은 우연이 ‘우연히’ 방향성을 가진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적 우연에서 역사적 우연, 우주적 우연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것은 우연에 의해 천변만화하는 듯하다. 쉬즈모의 시와 천추샤의 음악은 이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우연에 대해 깊이 사색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시구 (로이터연합)


쉬즈모·천추샤의 ‘우연’과 다른 차원에서 최근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동명 작품(?)이 있다.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59) 총리의 정치 퍼포먼스 시리즈물, 이름을 붙이자면 ‘아베의 우연’이다. 지난 5월6일 도쿄돔에서 열린 프로야구 시구식에 제96대 총리라서 등번호 96번을 새긴 유니폼을 입고 나왔는데, 자신이 개정하려고 하는 헌법 96조와 ‘우연하게도’ 숫자가 일치했다. 지난 5월12일 미야기현 항공자위대 기지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탑승한 전투기 편명도 ‘우연히’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를 연상시키는 ‘731’이었다. 지난 6일 요코하마항에서 헬기 호위함 ‘이즈모(出雲)’ 진수식을 가진 날이 히로시마 원폭 투하 68주년인 것도 ‘우연히’ 그렇게 됐다는 게 일본 정부의 해명이다.


일본 아베 총리 731’ 훈련기에 탑승



의도된 우연은 감동이 아니라 경계심과 실망감을 안겨줄 뿐이다. 바로 그걸 의도한 것이라면 ‘아베의 우연’은 성공작이다. 작품성 없는 흥행작이라고 할까. 그런 작품일수록 생명력은 별로다. 우연히 천추샤의 ‘우연’을 듣던 중에 준항공모함급 이즈모 진수식 뉴스를 접하고 우연히 떠오른 생각이다.



신동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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