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아>는 트로이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린 여행기다. 오디세우스는 여행 도중 만난 괴물이나 식인종들을 물리치고 10년 만에 귀향에 성공한다. 그가 난관을 극복하고 귀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지략과 담력 때문이었겠지만,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환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오디세우스는 그들이 제공한 숙식과 향응 덕분에 긴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의 모험담이면서 그리스인들의 환대담이다.
일본의 대한국 수출규제에 대응하는 첫 실무회의에 참석했던 산업통상자원부 전찬수 무역안보과장(왼쪽)과 한철희 동북아통상과장(오른쪽)이 지난 13일 오후 서울 강서구 김포국제공항으로 귀국한 뒤 굳은 표정으로 차량에 탑승해 있다. 연합뉴스
‘환대’는 인간 문명화의 핵심가치다. 인간은 환대를 통해 관계를 맺고 사회를 발전시켰다. 옛사람들은 나그네나 이방인을 외면하지 않았다. 인류 최초의 환대는 아브라함이 방문객들을 극진히 영접한 일이다(<구약성서> 창세기). 이는 결과적으로는 하느님을 접대한 일이었지만, 당시 아브라함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방문객들을 환대했다. 동양에서 낯선 이방인은 귀한 손님이었다. 인도 출신 허황옥을 김수로왕의 부인으로 맞이하고, 바다를 건너온 석탈해를 신라의 임금으로 떠받든 것은 고대인들에게 이방인을 환대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대로 환대는 ‘인간의 근원적인 덕목’인지 모른다.
환대에 관한 한 일본만큼 자부심 강한 민족도 없다. 일본인들은 자국 문화의 특징으로 ‘오모테나시(おもてなし)’를 꼽는다. 오모테나시란 ‘최고의 환대’를 말한다. 식당이나 료칸(旅館)에서 무릎을 꿇고 안내하는 종업원처럼 때론 지나친 오모테나시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오모테나시 정신은 일본 접객 문화의 모델로 활용되고 있으며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더욱 강조되고 있다.
지난주 일본 도쿄에서 한·일 통상당국 실무자 회의가 열렸다. 일본의 한국 수출규제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였지만, 호스트격인 일본은 한국 대표단을 환대하기는커녕 노골적으로 냉대했다. 참석자 명패도 없는 회의장은 썰렁했고, 양국 대표 간의 인사말이나 명함교환도 없었다고 한다. 명백한 ‘외교결례’다. 환대(hospitality)와 적대(hostility)의 어원이 되는 프랑스어 ‘hote’에는 ‘주인’과 ‘손님’의 뜻이 다 있다. 일본인의 ‘환대’는 ‘적대’의 다른 얼굴일까.
<조운찬 논설위원>
'경향 국제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아베 정부, 일본 지식인들의 고언에 귀 기울여야 (0) | 2019.07.29 |
---|---|
[편집국에서]세 살 아이에게 ‘소피의 선택’ 강요한 미국 (0) | 2019.07.26 |
[사설]미·중 무역갈등 봉합, 아직 안심 단계 아니다 (0) | 2019.07.01 |
[아침을 열며]끝나지 않을 라미레스 가족의 여정 (0) | 2019.07.01 |
[여적]푸틴에게도 조롱받는 ‘영국 민주주의’ (0) | 2019.07.01 |
댓글